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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서울 남대문 시장. 여느 때 같은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40~50대로 보이는 일본인 여성들이 전통 공예품점 앞을 지나가자 가게 주인이 일본어로 "예쁜 거 많아요. 구경하고 가세요"라고 외쳤다. 그러나 여행객들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대로 점포 앞을 지나쳤다.

'일본인 여성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들른다'는 명동의 명소가 있다. 네이처리퍼블릭 화장품 매장이다. 그러나 이곳도 요즘엔 다소 썰렁하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매장 곳곳에서 왁자지껄한 일본어가 들렸지만, 이날은 매장 고객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엔화 약세 탓이 주원인이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작년 9월 30만여명이었던 일본인 관광객 수가 12월엔 22만여명으로 3개월여 만에 약 8만명이 감소했다. 반면 2011년 동일본 지진 이후 2010년 대비 32% 급감했던 일본행 국내 관광객 수는 작년 연말엔 전년 대비 21% 늘었다. 해외전문 여행사인 '여행박사'는 "작년 12월 중순 일본 여행 예약이 한 해 전보다 20%나 늘었다"고 말했다.

여행업뿐 아니다. 엔저(低)는 금융·유통·제조·숙박업 등 산업계 전반을 변화시키고 있다.

◇나고야-제주 노선은 잠정 중단

최근 서울 명동 지역의 환전상은 비상상황이다. "대형업체가 엔화 급락 때문에 폐업했다"는 말도 나돈다. 회현역 M환전상은 "종일 앉아 있어봤자 엔화를 원화로 바꾸려는 고객이 없다"며, "엔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던 2008년보다 찾는 사람이 더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광화문·명동 일대 특급호텔에도 일본인 손님이 줄었다.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은 지난해 4분기에 일본인 투숙객 비중이 2011년 같은 기간보다 20%가량 줄었다. 플라자호텔도 같은 기간 일본인 고객 비율이 약 25% 이상 감소한 상황이다.

대한항공은 나고야에서 제주까지 노선을 다음 달 말까지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일본인 이용객이 줄면서 작년 4분기 제주행 탑승률이 2011년 같은 기간에 비해 7%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시아나항공 윤영두 사장은 "입국자 측면에서 보면 엔화 약세와 원화 강세 등 환율 변수가 꽤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제주항공 역시 같은 이유로 오사카부터 제주까지 노선을 중단한 상태다.

유통업체도 영향을 받고 있다. 대형마트에선 일본인들이 즐겨 사는 김과 '리얼브라우니' 과자도 작년 같은 기간 대비 8~10%씩 감소했다. 28일 대형마트에서 만난 직장인 스즈키(鈴木) 사야카(33)씨는 이번이 10번째 한국 방문이다. 스즈키씨는 "예전엔 한국 화장품 질이 좋아서 친구들 선물도 많이 사 줬는데, 이번엔 꼭 필요한 것만 사 갈 생각"이라고 했다. 휴대폰엔 김 ○개, 홍삼젤 ○개 등 미리 작성한 쇼핑 품목이 적혀 있었다.

유통업체는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내세워 일본인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롯데면세점은 한류(韓流)를 전면에 내세웠다. 다음 달 28일까지 잠실점과 코엑스점에 1만명이 넘는 일본인 관광객을 초청해 한류스타들이 사용한 소품 115벌을 참석자들에게 줄 예정이다. 롯데면세점은 "그간 한류스타 팬미팅에서 5~6벌을 제공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의상 증정 이벤트를 벌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롯데백화점도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머무는 호텔에 쿠폰북을 돌리고, 다음 달엔 일본항공(JAL)에 백화점 기내 광고를 할 예정이다.

◇엔화 대출 많은 기업은 희색

반면 일부 기업은 엔화 가치 하락을 반긴다. 28일 현재 원·엔화 환율은 100엔당 1199.49원대로 작년 11월 중순 1376원에서 10% 이상 내려갔기 때문이다. 5년 전 서울 강남에 병원을 개업한 김모(45)씨는 은행에서 '닥터론'이란 이름으로 엔화 대출을 받았다. 한동안은 100엔당 1500원이 넘는 엔고(高) 현상 때문에 경영이 어려웠다. 주변엔 이자 부담 때문에 폐업 직전까지 갔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엔 부담이 크게 줄었다. 엔화로 대출을 받았던 중소기업들 역시 대출금 일부를 엔화로 상환하고, 나머지를 원금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우리은행은 엔화 대출을 원화로 바꾸려는 중소기업을 상대로 엔화 대출을 원화로 바꿔주는 '엔화 대출 원화 전환 서비스'까지 출시했다.

대한항공은 엔화 부채 763억엔을, POSCO는 1400억엔을 갖고 있다. 이런 기업들은 일본과 무역 거래가 많거나, 일본에 반도체 등 생산품 수출을 많이 하고 있다.

배민근 LG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엔저 현상은 크게 보면 철강이나 자동차에는 안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엔화 대출이 많거나 일본으로부터 부품을 많이 수입하는 기업에는 호재"라며 "각 기업이 환율 변화에 얼마나 유연하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