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구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相生)이 우리 경제의 중요한 화두로 대두된 지 오래다. 그만큼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갈등이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왜 해결이 어려울까? 경제학 이론을 통해 살펴보자.

한 젊은 남자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런데 이 여자 친구는 취향이 너무 특이하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남자 친구의 자동차 색깔을 노란 형광색으로 바꾸자고 우겼다. 남자는 노란 형광색 자동차를 타는 게 너무 창피했지만, 새 여자 친구에 대한 사랑의 증표로 결국 자동차를 노란 형광색 페인트로 칠했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이름을 가슴에 문신으로 새겼으면 좋겠다고 졸라댔다. 남자 친구는 이것도 시키는 대로 했다.

이제 여자 친구는 이토록 헌신적인 남자 친구를 정말 고마워하면서 이전보다 친절하게 잘해줄까? 경제학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여자 친구는 헌신적인 남자 친구에게 고마워하며 잘 대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마구 대할 가능성이 크다. 자동차 색을 이상하게 바꾸고 가슴에 문신을 한 남자 친구는 이제 더 이상 다른 여성을 사귀기 어렵기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여자 친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이를 아는 여자 친구는 오히려 남자 친구를 쌀쌀맞게 대할 가능성이 크다. 실화는 아니지만 씁쓸한 이야기다. 이 청년의 문제는 자기 여자 친구 딱 한 사람만 좋아하는 것들에 너무 많이 투자한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투자를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relation specific investment)'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투자를 하다 보면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 이외의 사람들과는 관계를 맺기 어렵게 돼 상대방에게 인질이나 볼모로 잡혀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홀드업 문제(hold-up problem)'라고 부른다. 올리버 윌리엄슨(Oliver Williamson)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한 분석으로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특정 기업에 거래를 의존할 경우 볼모가 될 수 있다

홀드업 문제가 더 심각한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 바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거래이다. 어떤 대형 가구 제조업자가 새로운 형태의 혁신적인 가구를 개발해 상품화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가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나사와 못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구 제조업자는 나사와 못을 생산하는 한 중소기업을 찾아가서 자신이 가구를 많이 생산할 예정이니 지금까지 생산하던 나사와 못을 모두 중지하고 새로운 형태의 나사와 못만을 대량생산 해 달라고 요구한다. 새로운 나사와 못을 생산하려면 이 중소기업은 지금 보유하고 있는 기계의 대부분을 팔아버리고 새 기계를 구입해야 한다. 즉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때 이 중소기업이 가구 제조업자의 말을 믿고 자신의 생산설비를 모두 바꿔서 그 가구 제조업자에게만 필요한 나사와 못을 생산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서로 협력해 둘 다 이익을 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가구 제조업자가 이런 상황을 악용해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고 하게 되면 중소기업은 곤경에 빠질 수 있다. 특이한 형태의 나사와 못만을 생산할 수 있게 된 중소기업으로서는 해당 가구 제조업자가 유일한 판매처가 된다. 만일 가구 제조업자가 갑자기 나사와 못의 가격을 20% 깎아 주지 않으면 거래를 끊겠다고 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깎아줄 수밖에 없다.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대기업이 항상 유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홀드업 문제가 항상 대기업에만 이로운 것은 아니다. 앞의 사례에서 새 가구들이 히트를 쳐서 날개가 돋친 듯이 팔리고 있을 때 나사와 못을 공급하기로 약속했던 중소기업이 갑자기 나사와 못의 가격을 20% 인상해 주지 않으면 공급할 수 없다고 협박할 수도 있다. 대기업인 가구 제조업자의 입장에서는 나사와 못이 없어서 한창 인기가 오르고 있는 신형 가구의 판매가 중단되면 큰 손실을 보게 되므로 역시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나사와 못의 가격을 올려주게 될 가능성이 크다.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실제로 지난해 자동차 엔진부품 업체의 노조가 파업을 벌이자 기아차 생산라인이 멈춰선 일이 있었다. 기아차가 이 부품의 70%를 이 중소기업에 의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결국 홀드업 문제는 중소기업뿐 아니라 대기업도 피하고 싶은 골치 아픈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복잡한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 생산과정에서 한 가구에만 사용될 수 있는 나사, 한 스마트폰에만 사용되는 충전지, 한 건축업자만 사용하는 특수 페인트에 대한 수요가 점차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가 점점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의미다.

◇계약서만 잘 써도 예방 가능

이론적으로만 보면 이런 문제는 거래를 시작하기 전에 세밀한 계약서를 작성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계약서에 '가구 제조업자가 갑자기 나사와 못의 가격을 내릴 것을 요구하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약속된 구입량을 일방적으로 줄인다면 막대한 벌금을 낸다'는 조항을 넣는 것이다. 반대로 중소기업에도 '특별한 이유 없이 납품 가격을 올린다거나 납품을 줄이는 행위를 하면 큰 금액의 벌금을 낸다'는 조항을 넣는다. 이렇게 자세한 계약을 맺는다면 많은 문제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정부가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에도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계약할 때 인질로 잡혀서 손해 보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계약서 작성을 도와주거나, 변호사 비용을 지원해주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거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래비용을 줄일 방법을 정책적으로 마련해 준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이 한층 진전될 수 있을 것이다.

☞홀드업 문제(hold-up problem)

사전적 의미는 '손들어' '꼼짝 마'라는 뜻이지만, 경제학 게임이론에선 양자 간의 관계에 있어서 더 적극적인 쪽이 불리해져서 상대방에게 인질로 붙잡힌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를 설명할 때 주로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