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새 '달러 박스'로 부상하고 있는 심해(深海)용 원유 시추선인 드릴십(drillship) 수주를 싹쓸이하며 조선 강국의 위상을 굳히고 있다.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현대중공업·STX조선해양 등 국내 4대 조선업체의 드릴십 누적 수주 건수는 지난달 정확하게 100척을 채웠다. 첫 수주 해인 1996년 이후 16년 만에 일군 의미 있는 기록이다. 100호는 STX조선해양이 지난달 말 유럽 선사로부터 수주한 7억달러(약 7700억원) 규모의 극심해용 드릴십이 차지했다.

지난 16일 경남 거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들어섰다. 약 100m 높이의 마름모꼴 철탑을 품은 드릴십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선박 한가운데 철탑이 우뚝 솟아 있다. 수심 2000m 이상인 대양 한가운데에서 유전을 뚫기 위한 시추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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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선박 30여척 중 7척이 드릴십이다. 공정률 90%로 내년 2월 말 노르웨이 시드릴(Seadrill)에 인도될 드릴십인 '웨스트 오리가'도 그 중의 하나다. 아파트 7층 높이의 계단을 걸어 올라가 시추탑 주조정실에 접근하자 시드릴에서 파견된 직원 1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추 장비 테스트가 진행 중이었다. 김준철 상무는 "드릴십은 만들기가 워낙 어려워 다른 나라 조선소는 수주를 꺼리는 해양 설비"라면서 "해외 바이어들에게 여러 척의 드릴십이 동시에 건조되는 현장을 보여주면 대부분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드릴십 100척 수주는 중형차 300만대 수출 효과

드릴십은 원유 시추선이다. 생김새는 일반 상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한곳에서 수개월 동안 작업을 벌인 뒤 다른 현장으로 이동해 시추 작업을 벌일 수 있다. 척당 가격은 최소 5억달러(5500억원). 삼성중공업이 올 초 유럽 선사에 인도한 극지(極地)용 드릴십 가격은 10억달러를 넘었다. 1만3000개 안팎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가격은 1억달러 안팎이다. 배값이 비싼 만큼 이용료도 엄청나다. 하루 빌리는 데만 50만달러를 줘야 한다. 현재까지 발주된 드릴십은 전 세계적으로 134척. 전 세계 발주 물량의 75%를 한국 조선업체가 건조했거나 건조할 예정인 셈이다.

드릴십 1척이 평균 6억달러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드릴십 100척 수주로 벌어들이는 외화(外貨)는 600억달러에 달한다. 중형 자동차를 300만대 수출할 때 벌어들이는 외화와 비슷한 규모다.

국내 조선업체가 드릴십 건조에 처음 뛰어든 것은 삼성중공업이 미국 코노코(Conoco)로부터 심해용 드릴십을 수주한 1996년. 당시 국내 조선업계 일각에선 "조선업이 수년째 불황인데 제작 경험이 없는 드릴십을 수주한 것은 큰 패착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았다. 하지만 국내 최초의 드릴십인 '딥워터 패스파인더'는 1998년 9월 발주사인 코노코에 성공적으로 인도됐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조선업계의 우려 속에 인도된 국내 1호 드릴십은 지금도 멕시코만에서 유전 시추 작업에 투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조선업계, 고부가 선박 싹쓸이 이어질 듯

국내 조선업계의 드릴십 수주가 본격화된 때는 국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한 2005년부터다. 2000년대 초 20달러대에 머물던 유가는 2005년 60달러 돌파 이후 2008년 130달러까지 치솟았다. 유가가 치솟으면서 대형 석유회사는 심해 유전 개발에 앞다퉈 뛰어들었다. 심해 유전 개발에 필수적인 드릴십 발주가 쏟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삼성중공업이 1996년부터 현재까지 수주한 드릴십은 53척(점유율 42%)에 달한다. 올해도 지난달까지 8척을 수주했다. 2006년 드릴십 시장에 뛰어든 대우조선해양은 현재까지 23척, 2007년에 뛰어든 현대중공업은 18척을 수주했다. 조선업계에선 "내년 발주가 예상되는 드릴십 35척 중 한국 업체들이 30척 이상은 수주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다른 고부가가치 해양 설비도 한국 업체들의 싹쓸이 수주가 이어지고 있다. FPSO(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 설비)가 대표적이다. 드릴십이 떠난 자리에 투입돼 원유를 뽑아내는 FPSO는 가격이 최대 20억달러에 달하는 해양 설비다. 한국 업체들은 지난해와 올해 발주된 FPSO 4척을 모두 수주했다. 1척당 가격이 2억달러 이상인 LNG선은, 한국 업체들이 지난해와 올해 발주 물량 가운데 70%가 넘는 53척을 수주했다. 최광식 LIG투자증권 연구원은 "앞으로도 국내 조선업체들이 드릴십을 비롯한 해양 설비를 싹쓸이 수주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드릴십(drillship)

수심이 깊거나 파도가 심해 고정된 구조물을 설치할 수 없는 해상에서 원유와 가스 시추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선박 형태의 시추 설비. 길이가 228~230m에 폭 36~42m 정도다. 척당 최고 1조원에 달할 정도로 초고가 선박이다.

☞FPSO(floating production storage & offloading unit)

원유 저장용 하부 선체 구조(hull)와 원유 정제용 상부 설비(topside)로 구성된 '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 시설'. 수심 1000m 이상 깊이의 심해에서 채굴한 원유를 하부 선체에 저장했다가 운반선이 오면 넘겨준다. 드릴십과 달리 예인선에 끌려 목적지에 도착, 한자리에서 작업을 진행한다. '바다 위의 정유공장'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