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주니어 캠퍼스'를 만들 거예요. 버스에 기계 설비, 다양한 교재를 싣고 도서 산간벽지를 누비게 할 겁니다. 교육 혜택에서 소외된 어린이들이 자동차 원리를 배우고, 직접 만들어도 보고, 환경의 중요성도 깨닫게 하고…. 이달 말에 출범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할 거예요."

김효준(55) BMW코리아 사장은 수입 자동차 회사 사장 같지가 않았다. 지난달 29일 서울 회현동 BMW코리아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 내내 그는 '모범생' 같은 답을 내놨다. 기업의 '명예'와 '지속 가능성', 기업과 사회의 상호 기여·선순환 같은, 국내 대기업들이나 강조할 법한 사회공헌론을 듣는 것 같았다.

서울 회현동 BMW코리아 본사에 전시된 뉴1 시리즈 118d에 앉은 김효준 사장. 그는“차만 파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자동차 문화와 애프터서비스의 기준을 만들어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의 모범생 같은 경영론은 국내외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당장 한국 시장에서의 '실적'을 중시해야 할 BMW 독일 본사에서도 김 사장의 아이디어에 솔깃해하고 있다. '모바일 주니어 캠퍼스'는 물론, BMW 차를 사는 고객들에게 기부금을 내게 하고 그 기부금만큼 회사가 더 기부해 기금을 만드는 'BMW코리아 미래재단' 아이디어도 본사 이사회가 수용했다. BMW는 이 재단 모델의 전 세계 확대를 검토 중이다.

김 사장의 삶 역시 모범생 같았다. '성공한 고졸' 사례를 찾을 때마다 그는 늘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나중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경영성적도 빼어났다. 2000년 BMW코리아 사장을 맡아 연간 300대 남짓이던 판매량을 올해 3만3000대 수준까지 늘려놨다. 실적 100배 향상, 수입차 1위 업체의 위상도 확고하다. 최초의 현지인 BMW현지법인 사장, 아시아인 최초 BMW 본사 임원, 국가별 최초의 벤츠 판매량 추월 등 보유한 '신기록'도 많다.

'가난한 고졸 출신 경영인'은 사실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덕수상고를 졸업했다는 것 이외에 개인사(史)를 밝히길 꺼려왔다. 그에게 굳이 어린 시절 가장 갖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하자 한참을 망설였다. "자동차" 같은 대답을 기대한 건 엄청난 오산이었다.

"책상이에요. 그땐 엎어놓은 박스에 보자기를 씌우고 벽돌 몇 장을 받쳐 책상으로 썼죠."

그는 서울 금호동 산동네 단칸방을 전전하며 동생 네 명과 부대꼈다. 고1 때 중3짜리 열두 명을 모아놓고 과외를 해 동생들의 학비까지 댔다. 사범학교를 다니던 부친은 6·25 전쟁통에 월남(越南)해 건축업·인쇄업·운수업 등을 했지만 늘 시원찮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결국 직접 택시운전을 하다 큰 교통사고를 당해 10년 넘게 병석에 누웠다.

그에게 수입차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는지 물었다. 그는 '가능성'이 판단의 기준이 됐다고 했다.

"입사 인터뷰 때 회사의 역사를 듣고, 제품을 보니 도전할 만하고 존경받는 회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주위에선 반대가 많았죠. 당시엔 수입차를 못으로 그어버리고 수입차 주유를 거부한 주유소에 박수를 보내는 분위기였으니까요. 또 그땐 한 달에 10대도 못 파는 회사였는데 실적에 대한 걱정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잘 준비하면 꼭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분명히 보였어요." 김 사장은 "이 회사가 한국 자동차 산업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산차 브랜드들이 수입차와 경쟁하면서 세계적 품질을 확보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죠. 수입차가 들어오면서 ABS(잠김현상을 방지하는 브레이크), 에어백 같은 첨단장치가 장착됐습니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11개 업체가 세계시장을 휩쓸던 일본차 메이커들이 안방 문을 걸어잠그는 바람에 몰락한 것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 자동차 시장 대신 해외에 문을 연 건설중장비 시장에서는 고마쓰라는 브랜드가 일류 중장비 회사와 경쟁, 협력하면서 캐터필러를 능가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고졸 직장인이 외국계 기업의 CEO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일을 통해 계속해서 배운 것"이라고 답했다. 일을 통해 배우기 위해선 "자기 업무 영역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영역에도 관심과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력과 소통(communication)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1975년 첫 직장이었던 삼보증권(대우증권 전신)에 입사해 첫 여름휴가 사흘 동안 광주·부산·대구 지점을 돌았다. 매일 전화 통화만 했던 직원들을 만나 업무 얘기를 하면서 그 내용을 바탕으로 업무 양식 표준화 방안을 만들어 회사에 제출했다. 세 번째 직장인 제약회사 한국신텍스 경리부 차장일 때에는 충북 음성에 공장을 짓는 프로젝트의 허가를 받지 못해 회사가 철수하려 하자, 건설·농공단지·지방행정 관련 법전을 뒤지고 군수를 비롯한 군청 직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공장 허가를 받아냈다.

"자기 업무도 아닌데 나서면 질시를 받지 않느냐"고 묻자 "그래서 소통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고, 일을 배우고 회사가 성과를 내는 데에 만족해야지 자기 공(功)으로 돌리려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내세우지 않아도 김 사장의 공은 다 평가받고 있었다. 신텍스 미국 본사에서는 그를 '독특한 재무담당자(strange finance director)'라고 평했고, 당시 한국신텍스 미국인 사장은 "대단히 젊은 사람이지만 차기 혹은 차차기에 사장으로 쓸 만한 재목이다"라는 인사기록을 남겼다.

그는 BMW코리아 사장으로서 회사를 키울 수 있었던 건 마음가짐과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증해 보인 사례라고 말했다. "2000년 사장이 되면서 세 가지를 주문했어요. 벤츠를 이긴다는 뜻의 'B to B'(벤츠에서 BMW로)와 'B to C'(BMW는 고객을 지향한다), 그리고 '1 in 5'(1% 시장 점유율을 5년 안에 이룬다)였죠. 당시 우리 딜러(판매상)들은 '우리는 2등이니 싸게라도 팔아야 한다'고 했었고, 독일 본사에서도 한국 시장에서 어떻게 연간 1만대를 파느냐며 웃었어요. 그때는 우리가 300대 팔 때였거든요. 그해 바로 2100대를 팔면서 벤츠를 확실히 이겼죠. 그런 자신감이 2005년 전 세계 모든 시장에서 BMW가 벤츠를 이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서울 아셈(ASEM) 회의 의전 차로 BMW 고급차 135대를 제공하고, 1년에 고작 한 대 팔던 대형차 L7을 13대나 보내달라고 해 본사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런 과감한 마케팅으로 시장을 점령해 나갔다.

아이디어도 많이 냈지만 본사와 '대결'한 적도 많다. BMW코리아에 처음 입사했을 때에는 독일어로 적힌 문서를 영어로 보내달라며 본사로 돌려보내기도 했고, 사장이 된 후엔 4명의 독일인 부사장이 너무 많다며 그럴 바엔 차라리 사장을 독일인으로 바꾸고, 우리 직원들이 기회를 더 갖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김 사장은 많이 이뤘지만 벌여놓은 일도 아직 많다. BMW 소형차인 뉴 1시리즈를 들여오는 등 라인업을 계속 확충하고 있고, 무엇보다 독일, 미국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한국 영종도에 들어서게 되는 BMW드라이빙센터를 멋있게 건립해야 한다. 그는 모터사이클 면허를 따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2년 안에 모터사이클 면허를 따겠다고 본사에 약속했는데 마감이 한 달 남았다"며 웃었다.

그에게 '꿈'을 물었다. 그는 "나는 먼 길을, 아주 멀리 돌아왔다"면서 "후배들은 좀 더 빨리 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 글로벌 리더로 클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의 '모범생' 같은 답으로 돌아왔다. "사회와 기업이 같이 나아간다는 것, 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다듬어 나가고 실천하고 싶습니다."

[수입車 1등 이끄는 김효준은 누구인가]

-1957년 서울생.

-1975년 덕수상고, 1997년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졸업, 2000년 연세대 경영대학원 국제경영학 석사, 2007년 한양대 경영학 박사

-1975년 삼보증권 입사, 1979년 하트포드화재보험 경리과장, 1994년 한국신텍스 부사장

-1995년 BMW코리아 상무, 2000년 대표이사 사장, 2003년 BMW그룹 본사 임원(Senior Execu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