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려는 자 살고, 살려는 자 죽는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초유의 기업구조조정작업에 참여하면서 늘 되새기던 말이다. 역설적 문구 같지만 지금도 그 때의 결과물을 돌아보면 상당부분 들어맞는 그 섬뜩함에 놀라곤 한다.

기업이 더 큰 성장, 더 큰 수익을 추구하다 보면 위기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때론 경기침체라는 외생적 불운(?)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기업주의 독단 으로 인해 종종 치명적인 실수가 빚어진다. 감히 반대의견을 내기 어려운 게 현실인 일선 실무자로서는 조직의 침몰을 망연자실 지켜보는 탄식이 반복된다.

좋은 경제시스템이란 범죄적 실수가 아닌 한 실패기업에게 갱생의 기회를 부여하는 사회일 게다. 선진국이라 불리는 경제는 다들 나름의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실패의 용인은 사회가 마냥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이런 배려가 모험정신을 부추겨 경제 전반에는 활력을 가져오기 때문이리라. 여기에 거대기업의 기득권이란 계급장까지 떼어낸다면 더 좋은 경쟁사회가 된다.

기업갱생에는 채무조정작업이 수반된다. 과다채무를 감내하기 어려운 부실기업에게 만기연장, 금리감면, 출자전환으로 채무부담을 덜어주는 작업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규자금까지도 지원하는 팩키지 프로그램이다.

채무조정은 말 그대로 채권자에게는 추가손실부담이다. 대신에 당장 청산으로 가서 헐값으로 정리해 채무변제를 받느니 기업갱생을 통한 채무상환으로 채권의 가치가 더 높아지길 기대한다. 전문용어로는 계속기업가치가 청산가치보다 높다고 여겨질 때 채무조정안을 수용한다.

계속기업가치의 문제는 청산가치에 비해서 훨씬 많은 불확실성을 수반하는 여러 가정들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채권자로선 가정의 실현을 담보할 근거를 강하게 요구한다. 채무기업은 이를 입증해야만 채권자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 기업갱생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당연히 기업주가 얼마나 살신성인의 자세가 있는지를 통해 갱생의지를 가늠하게 된다.

부실기업이 채무조정을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채권은행 앞으로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하는 법정관리다. 막바지에 이르면 경영진, 아니 대개는 기업주가 두 가지 방안을 놓고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는 동일선상에 저울질 할 수 있는 등가물이 아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이라면 이는 무지의 소치이거나 비싼 돈을 주고 어디선가 잘못된 자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워크아웃은 법정관리와는 리그가 다르다. 기업구조조정촉진법에서 규율하는 채권금융기관들만이 참여하게 되므로 채무조정대상의 폭이 법정관리보다는 제한된다. 상거래채무나 시장에서 조달한 채무는 채무조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해당기업이 떠맡아야 하는 채무상환부담의 폭이 더 크다.

이런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법정관리보다 워크아웃을 신청하는 이유는 뭘까? 이론적으로 워크아웃에서는 신규자금의 지원이 더 수월하다. 또 신규투자라든지 업계의 환경변화에 따른 경영계획의 수정도 더 원활하다. 무엇보다도 상거래채권자를 보호함으로써 거래기반의 훼손이 적다는 게 운영상의 큰 장점이다.

채무조정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해당기업에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채무조정의 폭이 커지면 그만큼 주주나 기업주, 임직원의 손실부담이 비례해서 늘어난다. 경영상 제약도 커진다. 운신의 폭이나 자력갱생의 가능성은 워크아웃 상태가 유리하다.

현금흐름이 나아져서 상거래채권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면 경영의 유연성을 위해서는 워크아웃이 바람직하다. 능력이 안 되면 법정관리로 들어가야 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워크아웃기업은 법정관리기업에 비해서 회사의 현금흐름능력이 훨씬 낫다는 시그널을 시장에 보내는 셈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결국 워크아웃이냐 법정관리냐의 판단은 해당기업의 현금흐름 창출능력이 판단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 코너에 몰린 기업주나 경영진이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는 워크아웃과 법정관리의 선택을 회사의 현금흐름 상태가 아닌 자신들의 경영권 확보 여부로 판단할 때 일어난다.

요즘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채권금융기관들이 손실부담을 서로 미루고 적기에 합의를 도출하지 못해 망가지더라는 불확실성이 부각되면서 부실기업들이 법정관리부터 신청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워크아웃에서 규율할 수 없는 상거래채무나 부외채무가 너무 큰 데도 무리하게 금융기관채권에만 손실부담을 강요하다보니 일어나는 채권단의 불협화음 때문이다.

그 보다는 가급적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DIP(Debtor In Possession)란 장치가 기업주나 경영진에게는 법정관리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사실 현행 통합도산법에서 법조항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 부실책임이 큰 기업주에게 법정관리인 자격을 주고 계속해서 경영을 맡기는 것이 타당하냐 하는 논란은 꽤 오래 됐다. 특히 회생인가 후 권리주장을 거의 할 수 없는 채권금융기관 입장에서는 불만이 쌓였다. 웅진그룹 사태는 비등점에 이른 불만을 좀 더 가열한데 불과하다.

물론 저변에 잘게 깔린 중소기업들에게 DIP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매출규모가 400억-500억원에 이르러도 대부분 생산과 판매 모두 기업주의 개인역량에 의존하는 현실에선 기업주를 배제하면 운영이 힘들어질 수 있다. 그래도 개선은 필요하다. 단기간 내 정리계획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나거나 사주가 부실경영의 행태를 지속하는 경우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채권단의 견제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긴장이 없으면 갱생의지도 약화된다. 이런 기업들의 경우 회생확률이 5%나 되는지 궁금하다.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의 경우에는 다르다. 기업주나 경영진이 경영권 확보 차원에서 DIP 적용을 목표삼아 법정관리를 시도한다면 문제가 커진다. 이 정도면 시스템으로 움직여야지 한 두 사람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기업이다. 가상적인 경영공백을 우려해서 책임 묻기에 느슨하다면 갱생의지는 애초부터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런 기업은 갱생에 성공해도 문제다. 시장경제의 근간을 뒤흔든다. 이해관계자를 무시하는 부실기업주에게 던져주는 기득권의 또 다른 형태다. 경제민주화 개념에도 어긋난다.

특히 창업주의 경우 기업이 위기에 빠지면 경영권 집착이 강해진다.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 손을 놓을 수가 있겠는가. 판단이 흐려진다. 듣고 싶은 말만 듣게 된다. 법률적 자문도, 회계적 조언도 본인 생존에 필요한 쪽으로 해석한다. 현실에서 멀어진다.

기업갱생에는 마음가짐이 제일 중요한 법이다. 기업주가 혼자 살려고 하면 기업은 죽는다. 채권단의 마음을 사지 않고 갱생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기업주가 잘못 흘러가지 않도록 법적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도와주는 게 좋은 경제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