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똑같은 대답을 하는 지원자와 비슷한 스펙으로 꽉 찬 이력서는 이제 쳐다보기도 싫어요. 인터넷에서 족보가 돌았는지 면접 때 입고 오는 옷 스타일마저 비슷합니다."

현대카드의 청년 고객들이 여의도 현대카드 사옥 투어를 마친 뒤 "입사하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묻자 정태영 사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대학 4년을 어떤 생각으로 다녔고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알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기업들이 입사 지원자들의 똑같은 '스펙'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거의 모든 입사지원서마다 자격증 현황이나 공모전 수상 경력, 동아리 활동, 인턴, 해외연수·교환학생 경험 같은 스펙이 천편일률적으로 등장해 기업에 맞는 인재를 뽑아내는 '변별력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국민은행이 하반기 신입 행원 모집 때 이런 스펙을 써 넣는 난 자체를 없애 버린 것은 그런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다. 국민은행은 대신 입사지원서에 '문학·역사·철학 등 인문 분야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 통찰력·상상력·창의력 등을 향상시킨 경험을 쓰라'고 요구하기로 했다.〈본지 30일자 B1면 참조〉 국민은행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은행은 서비스업이라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중요한데 스펙과 같은 경직적인 지식보다는 인문학적 소양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똑같은 스펙(spec) 가득한 이력서

스펙이 좋아야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은 '잘못된 상식'이다. 현대기아차 인사 담당자는 "단순히 '스펙'을 쌓기 위한 봉사활동, 해외여행 및 연수 등 일관성 없는 대외 활동을 죽 나열하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기업들은 스펙에 나타나지 않는 진짜 소양을 보기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창의(創意) 플러스(Plus)'란 이름의 특별 전형을 실시했다. 소프트웨어와 디자인 분야 지원자를 대상으로 필기시험(삼성직무적성검사) 없이 면접만으로 채용하는 제도다. 지원자가 전공과 상관없이 본인의 재능과 역량을 증명할 수 있는 에세이와 작품집을 제출해 통과하면 선발되는 방식이다.

'탈(脫)스펙 채용' 다양한 시도

작년부터 우리은행 특성화고 출신 계약직 사원 입사 지원자는 2차 면접에서 '깜짝 카드'를 뽑아야 한다. 카드에는 코끼리·원숭이·사탕 같은 물건이 그려져 있다. 면접관은 "여러분은 코끼리·원숭이·사탕을 팔아야 하는 세일즈맨입니다. 면접관을 고객으로 생각하고 팔아보세요"라고 말한다.

SK그룹은 올해 처음 바이킹형 인재 채용 전형을 도입했다. 입사 희망자가 아무런 서류 없이 채용 담당자를 만나 5분여 현장 인터뷰를 하고, 채용 담당자가 끼와 열정이 넘치는 인재라고 판단되면 서류 전형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조돈현 SK㈜ 기업문화팀장은 "스펙만 좋은 사람은 입사 이후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바로 퇴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자기 분야에서 끼와 열정을 바탕으로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바이킹형 인재를 선발하는 데 역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입사 지원자들이 스펙에만 치중하는 것은 사회적인 낭비라고 지적한다. 올해 초 국민은행에 입사한 김모(23)씨는 대학 재학 중 금융 관련 자격증 3개를 땄다. 3학년 때 자산관리사, 4학년 때 재무설계사와 파생상품투자상담사 시험에 합격했다. 자격증 하나 따는 데만 80만원씩 들고, 준비 기간도 1년 이상 걸렸다. 틈틈이 컴퓨터 자격증도 3개 따 이력서를 가득 채웠다. 요즘 김씨가 하는 일은 창구에서 고객의 입·출금을 도와주는 일이다. 국민은행 인사 담당자는 "PB(프라이빗뱅커·부자들의 자산관리를 돕는 전문직)가 되기 전에는 써먹을 일이 없는 자격증들인데 왜 미리 자격증을 따느라 돈과 시간을 낭비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력 채용 과정에서 기업들이 지원자들의 스펙을 전혀 안 본다고 할 수는 없다. 입사 지원자들의 학력과 학교 성적, 외국어 구사 능력 등은 여전히 중요한 채용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