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십수년 전이 되어버린 외환위기 당시의 기억이다. 당시 하루가 멀다 하고 거대기업들이 무너졌다. 치솟는 고금리에 수백 퍼센트에 이르는 과다한 부채비율로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단층적 쇼크로 다 무너지게 해서는 경제가 위태로웠다. 일시적 유동성 부족 여부와 생존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이 급선무. 그 다음에는 적절한 만기연장과 함께 적정 채무부담능력을 계산해서 걸맞은 채무조정을 해주는 게 수순이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서 우리는 교본이 필요했다. 턴어라운드(turn-around)에 관한 미국의 사례집을 뒤져보니 난감했다. 웬일인지 그곳에서는 이제 워크아웃이란 프로그램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닌가.

이유는 간단했다. 채무조정이란 기본적으로 금융기관들끼리 모여서 헤어컷(hair-cut)을 해주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금융기관들이 부실기업의 대출채권을 유동화해서 시장에 이미 팔아버렸기 때문에 들고 있는 채권이 확 줄었다는 것이다. 기업들도 자본시장에 가서 직접 기채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거나 자신의 매출채권을 유동해서 투자자에게 매각했다. 이처럼 증권화 과정이 심화되다 보니 채무조정을 위한 회의를 열어도 채권금융기관이 별로 없어 썰렁한 회의장이 되어버렸다.

사실 80년대 이후 남미에 돈을 빌려주고 떼인 미국은행들은 적극적으로 장부에서 부채와 자산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소위 수수료 비즈니스를 추구하면서 부실화될 대출자산의 원천을 없애버리면 리스크도 원천적으로 제거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열풍이 이어졌다.

그 뒤로 발전(?)을 거듭하여 미국에서는 주택담보대출을 풀링(pooling)해서 RMBS(주택담보유동화대출)나 커버드 본드(covered bond)로 유동화를 하고 최근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러온 서브프라임을 둘러싼 CDO나 CDS까지 기술적으로는 진일보했다.

이렇게 유동화와 증권화, 재유동화와 유사 파생상품화로 진화할수록 투자자의 구미에 맞게 투자상품의 선택폭이 확대된다. 그에 따라 금융시장은 보다 효율적이 될지는 모르겠다. 물론 기업들도 자금조달의 다양성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별 경제주체들의 이득만 발생하고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전혀 없는 걸까?

당연히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작금의 금융위기를 보면 그것도 아주 크다. 미국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채무자가 채무조정으로 돈을 갚고자 원래의 대출금융기관을 찾아가도 이제는 자기 채권이 아니라고 한다. 유동화해서 팔아버렸으니 거기를 찾아가라고 한다. 2차, 3차로 유동화를 했으니 최종적인 채권보유자가 모호해졌다. 이제부터는 미시 수준의 기계적인 압류와 청산 프로세스 밖에 길이 없다.

교재 말미에 약간의 친절은 있었다. 채무조정이 필요한 기업은 사전에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금융기관의 돈을 빌려서 시장에 나간 일반투자자들의 채무부터 상환하고 줄이라는 거다. 물론 돈을 빌리려면 회사의 부실징후를 숨기는 기술이 꼭 필요하다.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아주 냉철한 조언이다.

요즘 풍림산업, 벽산건설, 삼부토건 등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중견건설사들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들 회사의 특징은 회사가 장부에 들고 있는 주채무에 비해 부동산PF의 시행사에 서준 보증채무가 훨씬 컸다. 유동화증권(CBO)까지 더하면 채권구조는 제법 복잡해졌다. 주채권을 보유한 금융기관들만으로는 실효성 있는 워크아웃을 끌고 나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과거를 돌아보면 외환위기 당시에는 금융기관들이 채권의 95% 이상을 보유하고 채권단에 다 들어왔다. 5% 정도의 나머지 채권은 갚아줘도 워크아웃의 큰 틀은 유지됐다. 부실규모는 더 컸어도 작업 측면에서는 차라리 그때가 채무조정이 손쉬웠다.

은행권은 능력 검증이 부족한 시행사에 PF대출을 해줬다. 불안하니 시행하는 건설사의 보증을 요구했다. 건설사는 표면적인 부채비율을 관리해야 했다. 투자자가 주석사항을 뒤져봐야 알 수 있는 보증채무가 장부상에 확연한 주채무보다는 낫다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보증채무 규모가 주채무보다 여러 배나 커졌다.

그 결과 보증채권자인 PF대주단이 각성하고 대승적으로 헌신하지 않는 한 워크아웃은 멈출 수밖에 없는 구조다. 보증채무와 상거래채무를 동결 구속하려면 남는 수단은 법정관리 밖에 없다. 수년간을 끌어온 워크아웃 작업이 인장점에 이르면서 법정관리로 귀결되고 있다. 그 사이에 신규자금을 부담해온 주채권 금융기관들만 녹아났다.

워크아웃이란 수학적 정리나 공식이 아니다. 아무 때나 그대로 대입해선 안 된다. 구조조정에는 늘 창의적이고 선택적인 모색이 필요하다. 작동하는 환경설정이 우선이다. 아무리 멋진 세단도 도로가 부실하면 달릴 수가 없다. 금융시장도 공학적으로 마냥 복잡하게 전진한다고 해서 절대선은 아니다. 단순함과 명료함이 미덕일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