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철민 위자드웍스 대표

최근 2주간의 일정으로 실리콘 밸리에 다녀왔다. 미국에 우리 회사 신제품도 소개하고 투자 유치도 타진하기 위함이었다. 매년 이맘때 컨퍼런스나 전시회를 참관하기 위해 그곳을 방문하곤 했지만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보고 듣기만 하는 관찰자의 역할에 머물렀다. 그러다 올해는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왔다. 말하자면 짧게나마 참여자가 되어본 것이다.

처음으로 참여자가 되어 보니 관찰자로 6년을 다녀온 것보다 더 많은 이해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중 실리콘 밸리 창업 문화에 대해 조금 더 배울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너무나도 자유로운 ‘연결 문화’였다.

필자가 처음 찾아간 곳은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소개받은 현지 투자 업체 한두 곳뿐이었다. 그런데 의지를 가지고 만나러 다니니 거기서 다른 회사를 소개해 주고, 소개받아 찾아간 회사에서 또 다른 회사를 소개해 주고 하며 만날 곳이 금세 불어났다.

결국 2주간 하루 3명씩 거의 30여명의 현지 투자자와 기자, 블로거, 업계 전문가들과 만나 사업에 관한 여러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영어 울렁증 때문에 자신감도 부족하고 사업계획에도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조언을 받으며 매일 밤 조금씩 고친 결과 여정의 끝에는 자신감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어디를 가나 “내 지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는데 만나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며 그 자리에서 이메일을 써주거나 전화를 걸어 소개해 주는 ‘쿨한 연결’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인들에게 누군가를 연결하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갑작스런 소개 메일을 받고도 아무도 뜬금없다 생각지 않았고,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였다. 소개를 받으면 바로 며칠 안에 대표든 이사든 만날 수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과연 한국이었다면 그토록 자유롭게 사람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물론 미국에서는 열심히 돌아다닌 까닭도 있지만 그래도 한국과 미국의 연결 문화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요즘 한국의 창업 생태계에서는 네트워크를 마치 소유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최근 정부로부터 주도된 청년 창업 붐과 함께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 인큐베이터와 엑셀러레이터들을 보며 들게 된 생각이다.

인큐베이터와 엑셀러레이터란 창업을 준비중이거나 고려하고 있는 이들에게 창업 교육을 제공하고 창업자금이나 사무실을 지원해주는 회사나 단체를 말한다. 창업 후에는 회계나 특허 서비스를 연계해 주기도 하고 가까운 언론사나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키우는’ 회사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이들은 창업자에게 이 같은 서비스를 제공한 댓가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거나 창업한 회사의 주식을 취득하기도 한다. (실제로 요즘 창업하는 벤처 회사 치고 최소 한 곳 이상 인큐베이터에 소속되지 않은 회사를 찾기 힘들 정도다.)

초기에는 이미 성공한 선배 창업자들이 후배들에게 창업의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초기 운영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최근에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급조되는 인큐베이터도 늘고 있다. 심지어 창업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들까지 창업자를 길러내겠다며 인큐베이터를 만들고 있다. 오죽하면 업계에서 ‘창업자보다 인큐베이터가 더 많다’는 농담까지 들려온다.

필자는 많은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입장이다. 함량이야 어떻든 간에 창업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있는 이들이 창업자들을 돕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한가지 우려하는 것은 인큐베이터들이 자기가 아는 투자사 등 인적 네트워크를 오로지 자기가 키우는 포트폴리오 업체들에 폐쇄적으로 밀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큐베이터가 많아지면서, 인큐베이터들끼리도 무한 경쟁에 접어들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성공하는 포트폴리오 기업이 많이 나와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자기가 가진 네트워크를 자기 포트폴리오 기업에 집중적으로 몰아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흔한 트위터 리트윗(RT)이나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 클릭도 다른 인큐베이터에서 키우는 회사라면 좀처럼 해주지 않는다. 각자 자기 진영에서 돕고 있는 회사에 대한 소식은 열심히 퍼 나르면서 다른 진영에서 키우는 회사 소식은 그 회사가 아무리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좀처럼 관심을 주지 않는다. 너무나도 조직적인 ‘팔 안으로만 굽기’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이해가 되나, 우리는 정말로 그래서는 안될 것이다. 클 싹이 보이는 회사라면 내가 키운 회사가 아니더라도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이 더 빨리, 더 크게 성공하여 다시 업계 후배들에게 재투자를 하고 좋은 경험을 한 창업자들이 재창업에 뛰어들어 보다 건강한 창업 생태계를 만드는데 일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재투자로 또 될성부른 새싹들이 자라나고, 그 새싹들이 다시 성공하여 업계에 투자하고, 이 같은 선순환이 시작되어야만 다른 인큐베이터들이 키우는 회사들에게도 언젠가 투자와 인수와 좋은 인재 수급의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그 생태계는 망가진다. 창업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지금 수많은 창업자들과 인큐베이터들이 성공을 위해 뛰고 있지만 아직 대형 성공 케이스는 티켓몬스터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다. 창업 생태계의 물길을 뻥 뚫고 이 물이 시원하게 흐르게 하려면 수많은 작은 창업자와 인큐베이터들끼리의 ‘제 식구 챙기기’로는 절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 업계는 지금 물길을 뚫을 대형 성공 케이스가 필요하다. 그런 큰 케이스가 한두 개만 나와준다면 창업을 하지 말라고 해도 대학생들이 너도나도 창업에 뛰어들 것이며 민간 투자도 활성화되어 정부 주도의 기형적인 벤처 돈맥도 조금은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큰 성공 케이스가 있기까지 도와준 인큐베이터들의 위상도 자연스레 높아지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경쟁사가 아니라면, 될성부른 회사는 우리 업계가 각자 이익을 떠나 서로 밀어주면 좋겠다. 출신 학교를 떠나, 어느 인큐베이터 소속을 떠나서 창업 기업들이 과감히 이합집산하고 와글와글 서로 사업 제휴할 수 있어야만 우리는 더 큰 성공 케이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회사가 뜬다 싶으면 우루루 몰려가 그 회사가 갈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한 번 멀리 보내보아야 한다.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하는 창업자가 있다면 실리콘 밸리 사람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팔을 걷어 부치고 여기저기 소개해 주자. 비록 내가 오랜 시간을 공들여 만들어 온 나만의 인맥이라 할지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먼저 손을 내밀자.

우리는 항상 실리콘 밸리식 선순환의 창업 생태계를 부러워하면서, 사실 더 큰 벤처 회사를 만들려는 공동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있다. 지금 밀어주면 될성부른 떡잎이 수두룩하다. 제대로 IPO까지 꿈꿔볼 수 있는, 대기업이 M&A하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멋진 벤처 회사를 만들어 보자.

그러려면, 다같이 뭉쳐야 산다. 인큐베이터들끼리 각자 뭉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우리 업계는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가? 사돈도 사고 사촌도 사고 형제도 사야만 언젠가 나에게도 기회가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