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크 애브소버 원리
건물과 지반 최대한 분리 상하좌우로 장치 움직여 수직·수평진동 모두 차단

면진과 스마트의 만남
충격 흡수 신소재 넣고 지진 유형도 통계로 분석
추후 닥칠 지진파 대비… 미래 유망기술로 떠올라

1995년 1월 17일, 규모 7.2의 대지진이 휩쓴 일본 고베시 거리. 진앙(震央·지진 발생의 중심지)에서 20㎞ 정도 떨어진 곳에 건물 두 동이 거의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비결은 두 건물의 설계와 시공에 면진(免震) 기술을 적용한 것이다. 지진 발생 시, 지진 충격으로부터 구조물이 견디거나 피해를 보지 않도록 안전하게 보호하는 첨단 기술인 면진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지진력에 저항하도록 기둥·철근 같은 구조물을 최대한 튼튼하게 설계하는 내진(耐震), 건물 상층부에 거대한 추(진자형 제진장치) 같은 별도 장치를 설치해 지진 발생시 충격과 요동을 억제하는 제진(制震)과 달리 '면진'은 구조물과 지반을 분리해 지진력이 직접 구조물로 전달되는 양을 최대한 줄이는 게 특징이다. 가장 이상적인 의미의 면진은, 하늘에 떠있는 비행기가 지진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구조물을 땅에서 완전히 띄워놓는 것이다. 하지만 건물을 허공에 세울 수 없으므로 수평·수직 방향의 지진 충격파로부터 모두 완벽하게 안전한 건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자동차 '쇼크 애브소버' 원리와 유사

면진은 자동차의 쇼크 애브소버(shock absorber·완충기)와 닮았다. 지면에서 발생하는 충격을 자체 흡수해 구조물 내부로 전달되는 충격을 줄이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면진 구조는 보통 건물의 하부나 중간에 건물의 무게를 지지하면서 수평 방향으로 부드럽게 변형이 가능한 '아이솔레이터(isolator)'라는 장치로 구성된다.

쇼크 애브소버가 주로 수직 방향의 충격에 대응하는 데 비해, 면진 구조는 수직·수평 방향의 충격 모두에 대응한다. 지진이 발생하면 면진 장치가 설치된 층이 상하좌우로 움직여 충격을 흡수한다. 면진 재료와 장치로는 다양한 재료 여러 장을 쌓은 복합판이나 미끄럼받침이 쓰인다. 복합 받침은 강철·고무·납 등 비중과 성질이 다른 여러 소재를 쌓아 만든다. 지하에 저수조를 설치해 물의 부력을 이용하거나 끈적끈적한 점성 재료, 로프를 이용한 면진 장치도 있다. 최근에는 강철 베어링이 달린 기계 장치를 이용해 충격에 반응해 굴러가는 장치도 등장했다. 상상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진 충격을 분산하는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현재 이란)의 수도이던 파사르가다이에서 이런 면진 원리를 적용한 건물이 발견됐고, 기원전 6세기에 지은 사이러스 페르시아제국 황제의 무덤에도 기초적인 면진 공법이 적용됐다.

'스마트 면진'으로 진화…일본 시장만 6조원 육박

면진 기술은 지진이 빈발한 일본에 가장 활발하게 보급됐다. 이 기술을 적용한 고층건물만 5000동(棟)이 넘는다. 건물 개조 공사에서 면진 시장 규모는 연간 4000억엔(약 5조7000억원)이 넘는다(일본 야노경제연구소). 미국은 1985년부터 LA 등 서부 연안 지역의 공공기관·병원·역사적 건축물 등 300여건에 면진 기술을 적용했다.

국내에서는 부산의 명물인 광안대교에 납진동판을 이용한 면진 기술이 적용됐고, 서울 당산철교는 1996년 재시공 과정에서 면진 장치를 일부 장착했다. 올 12월 완공 예정인 LG CNS 부산데이터센터는 국내 데이터센터 최초로 면진 설비를 적용, 규모 8.0의 지진에도 버틸 수 있다. 인천국제공항 관제탑, 양양국제공항 관제탑, 부산 해운대센텀시티 등에도 면진 기술이 채택됐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면진 기술은 소재 기술과 결합해 '스마트 면진' 기술로 최근 진화하고 있다. 이 기술은 수직으로 가해지는 힘은 물론 수평으로 가해지는 지진 에너지도 함께 흡수하는 재료와 설계 방법을 쓴다. 내진 설계와 제진 설계를 모두 포함해 종합적으로 건물의 안전성을 높이는 것이다. 현재 진동제어 장치에 인공지능 등 첨단 스마트 기능을 추가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진파의 파형에 수동적으로 대응한 기존 방식과 달리, 지진 유형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추후에 닥칠 지진파에 상응하는 진동을 발생시켜 건물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광안대교·인천국제공항 관제탑 등 도입, 전문 인력 키워야

면진 기술의 시장성은 유망하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최근 10년간 전 세계 공학 논문 약 2000만건의 빅데이터 자료 분석을 토대로 '스마트 면진 시스템'을 미래 유망 기술의 하나로 선정했다. 면진 기술은 사회기반시설 같은 구조물은 물론 박물관 내 문화유산·예술작품과 통신·전산 장비 시스템 보호 등에도 폭넓게 보급될 전망이다. 대규모 콘서트홀의 방진 패드에 면진 기술을 적용할 경우, 지진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자동차·지하철 등에서 나오는 진동을 제거하는 효과도 있다.

국내 도로교설계기준에는 2005년에 면진 기준이 채택·추가됐으나, 건축 분야에는 관련 기준이 없다. 빌딩·주택 등 건설에 면진 설계 기준이 없는 셈이다. 면진 프로젝트를 맡을 설계 전문 인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면진 장치를 만드는 국내 기업들의 기술력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국내외 건설시장에 면진 기술이 본격 도입되면, 폭발적인 성장과 부가가치 창출이 기대된다. 업계와 정부가 면진 기술 개발과 전문 인력 양성, 상업적 적용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