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한양대 특임교수·경영학박사

필자가 미국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디지털 방송 시작을 계기로 고화질 디지털 텔레비전(HDTV)을 새로운 전략제품으로 삼아 미국 시장에서의 도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시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 매출이 많지도 않았고, 국내에서 완제품으로 들여와 판매하다 보니 아직은 가격 경쟁력이 없어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해당 사업부에서는 '몇 대 팔지도 못하는데 시장이 성숙될 때까지 미국에서는 TV 판매를 중단하자'는 의견을 보내왔다. 사업의 손익을 책임져야 하는 사업부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강자가 되겠다고 유통업체를 설득하는 회사가 디지털 시대 중심에 있는 TV를 판매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무슨 미래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새해 초, 회사 전체의 연례 전략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본사로 들어왔지만 머리는 온통 이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전략회의가 시작되고 미국 법인의 현안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마침 주어졌다.

필자는 다소 엉뚱할 수도 있는 화두를 꺼냈다. "맥도널드(McDonald)에는 3개의 사업부가 있다고 합니다. 햄버거 사업부, 감자 사업부, 그리고 음료수 사업부입니다. 그런데 햄버거는 경쟁사의 낮은 가격대에 맞춰 1~2달러에 파는 가격 경쟁을 하다 보니 늘 적자를 면치 못한다고 합니다. 평균 30% 정도 적자랍니다. 반면에 감자는 40% 정도 흑자, 음료수는 60% 정도 흑자가 난다고 합니다. 감자와 콜라를 팔면 이익이 남는데 햄버거는 팔면 팔수록 손해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맥도널드가 이제부터 이익이 나는 감자와 콜라만 팔고 햄버거는 팔지 않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햄버거를 팔지 않는 맥도널드가 얼마나 오랫동안 맥도널드 간판을 달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TV를 팔지 않는 가전회사가 어찌 주류 가전회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햄버거 가게 이야기에 빗대어 미국 시장에서 TV 사업을 포기할 수 없음을 피력한 것이다. 이 논의를 계기로 미국 시장에서 TV 사업의 중요성에 대한 합의를 이루게 되어 TV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회사의 현안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긴 했지만, 전체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로 상대 사업부의 입장을 곤혹스럽게 한 것이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 방법이었던가? 그리고 그 못지않게 아쉬운 것은 TV 판매 결정이 해당 사업부의 손실 부담에 대한 해결 없이 회사 전체의 논리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인센티브나 관리시스템의 조정 없이 명분만 가지고 특정 사업부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해서는 지속적인 시너지 창출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소니가 왜 아이팟을 만들지 못했을까?

경영학에서는 회사의 조직이 커지면서 이렇게 사업별 책임 경영을 강조하다 생기는 문제를 '사일로 현상(silo effect)'이라고 말한다. '사일로'는 곡식을 저장해두는 원통형의 독립된 구조물로 조직 장벽과 부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인다.

그런데 사실 '사일로 경영'은 책임 경영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사업부가 제품별 특징과 실적에 따라 서로 다른 전략을 세우는 것은 불확실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소니(Sony)는 일찍부터 사일로 경영을 시도한 회사다. 소니는 사업이 점점 확대되고 규모가 커지면서 급속한 환경 변화에 대해 각각의 사업이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사업부가 별도의 독립회사처럼 운영되도록 한 컴퍼니(Company) 제도를 도입하였다. 책임 경영과 현금 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해당 사업부가 손익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자산에 대한 책임까지 지는 가장 강력한 사업부 제도이다. 그러나 이후 각 컴퍼니가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경쟁하면서 사일로 경영의 부작용에 잘 대처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호사가들이 제기하는 "왜 소니가 아이팟(iPod)을 만들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의 답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소니의 경우 단말기 쪽에서는 PC 사업을 담당하는 바이오(Vaio)컴퍼니와 워크맨을 만들던 오디오컴퍼니, 그리고 자회사 형태로 존재하던 아이와(Aiwa), 3개 컴퍼니에서 뮤직클립, 디지털 워크맨, MP3라는 이름으로 엇비슷한 3개의 제품을 각각 거의 동시에 출시했다. 저마다 훌륭한 제품이긴 했지만, 아이팟에 비하면 조금씩 부족했다.

또 음원서비스 쪽에서는 음반 회사인 소니뮤직(Sony Music)을 내부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컴퍼니 간에 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온라인 뮤직 스토어(애플의 앱스토어 같은 것)에서도 시너지를 내지 못했다. 그 결과 소니가 가진 수많은 강점에도 30여년 지속해 온 워크맨 신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만약 소니가 컴퍼니의 경계를 넘어 각 조직의 역량을 한곳으로 모아 제품과 뮤직스토어 사업을 만들었다면, 아이팟을 능가하는 우수한 융·복합 제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사일로를 아우르는 회사의 핵심가치가 점점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각각의 분야에서 전문 제품을 만들기만 하던 전문성의 시대에서 서로 다른 기술을 합쳐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융·복합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제 고객들은 사일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비즈니스와 제품의 출시를 요구하고 있다. 사일로 간의 칸막이가 숨을 쉴 수 있어야 한다. 사일로 간의 소통으로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각각의 사일로가 가진 강점을 엮어낼 때 성공의 공식(Winning Formula)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일로(silo)

곡식을 저장해두는 원통형 모양의 독립된 창고를 말한다. 조직의 각 부서들이 사일로처럼 서로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자기 부서의 이익만 추구하는 현상을 경영학 용어로 사일로 효과(silo effect)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