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미국 중부의 조용한 도시 솔트레이크시티가 갑자기 4000여명의 인파로 북적였다. 글로벌 소프트웨어 업체 어도비(Adobe)가 주최한 '디지털 마케팅 서밋(Digital Marketing Summit)'에 참가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마케팅 전문가들 때문이다.

각자의 영역에서는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는 이들이지만 IT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생소한 기술 용어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듣고 받아 적는 모습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집중하게 하였을까?

어도비의 CEO인 샨타누 나라옌(오른쪽)과 디지털 마케팅 총괄 부사장인 브래드 랜처가 지난달 21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디지털 마케팅 서밋'에서 디지털 자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디지털 자아, 학문에서 비즈니스 영역으로

이번 행사의 슬로건은 '디지털 자아(Digital Self)의 힘'. 디지털 자아는 원래 현실과 괴리된 사이버 공간에서 형성되는 가상의 자아를 의미한다. 게임과 같은 가상공간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논문에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링크드인(LinkedIn), 포스퀘어(Foursquare) 등 사람들의 관계와 행동을 담아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급속하게 확산하면서 이제 디지털 자아와 현실 자아가 동일시되고 있다. 트위터 공동 창업자인 비즈 스톤(Biz Stone)은 "온라인 공간에서 비치는 디지털 자아는 나의 실제 자아와 거의 같다"고 말했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소비자의 모든 디지털 활동을 측정할 수 있게 되면서 과거 학문 영역에서 연구되던 '디지털 자아'가 비즈니스에서 실제로 활용 가능한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마케팅·광고·출판·엔터테인먼트 등 소비자의 성향을 파악해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영역에서 '디지털 자아'를 분석하는 능력은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시도됐던 개인화(Personalization)가 비로소 비즈니스의 근간을 바꿀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설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성향 분석에서 예측 마케팅까지 발전

어도비의 디지털마케팅 총괄 선임 부사장인 브래드 랜처(Rencher)는 기조연설에서 페이스북, 트위터, 링크드인 등에 펼쳐진 자신의 디지털 자아 정보를 화면 가득히 소개하면서 "기업이 고객과 교감하는 방식이 새롭게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옐프(맛집 공유 사이트)는 내가 한국 불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스포티파이(온라인 음악 서비스)는 내가 듣는 음악을 통해 현재 기분을 감지한다. 가민(GPS 응용 서비스)은 나의 평균 심박 수를 감안해 올해 사이클링 훈련을 일찍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며 "이런 정보를 모두 모아 마케팅에 활용하면 비즈니스의 틀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 행적을 파악해서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은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 등 대형 인터넷 기업들이 집중해온 분야다. 이용자가 구글에서 검색한 기록을 바탕으로 맞춤형 광고를 보여주거나 아마존에서 구매한 성향을 파악해 제품을 추천해준다. 어도비는 이번에 단순히 기존 고객들의 활동을 사후 분석하는 수준을 넘어 실시간으로 웹사이트나 휴대폰 접속자의 상황과 성향을 파악해 반영하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아웃도어 의류를 판매하는 웹사이트에 어도비의 CQ 솔루션을 탑재하면 이용자가 접속한 위치는 물론 SNS 공간에서 활동한 내용을 바탕으로 웹사이트 내용이 달라진다.

디지털 자아를 활용한 마케팅은 앞으로 닥칠 위험을 발견하고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마케팅 전략을 수정하도록 제안하는 수준까지 발전하고 있다. 어도비가 선보일 예측 마케팅 도구는 특정 기간의 판매 추이 이력과 온라인 배너 광고와 검색 엔진 광고, 소셜 미디어 캠페인 등 주요 디지털 마케팅 채널별 예산 투자 이력을 교차 분석하여 주어진 기간 내에 추가 매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채널별, 노출별 투자 전략을 제시한다. 어도비 외에도 이그젝트 타겟(Exact Target), 리스폰시스(Responsys) 등 디지털 마케팅 전문 업체들이 고객의 성향을 파악해 비즈니스 대응 방안을 마련해주는 솔루션을 선보였다.

◇신뢰와 프라이버시 문제 해결이 관건

디지털 마케팅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서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는 점에서 최근 유행하는 빅데이터 개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도 결국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이다. 어도비는 9곳의 데이터센터 2만3500개 서버에 매년 6조 건 이상의 거래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27페타바이트(1페타바이트는 약 100만 기가바이트로 DVD 영화 17만 4000편을 담을 수 있는 용량)가 넘는 규모다. 랜처 부사장은 "디지털 자아를 활용한 마케팅 기법은 데이터 자체보다 그 데이터가 남긴 작은 흔적들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빅데이터 개념보다 훨씬 복잡하고 거대하다"고 단언했다.

디지털 마케팅 솔루션은 아직 현장의 신뢰를 완전히 얻지는 못했다. 어도비가 주도하고 나머지 기업들은 분위기를 살피는 형국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난 한 참가자는 "수많은 디지털 자아의 행적을 분석해서 마케팅 전략을 알아서 짜준다는 프로그램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며 "아직은 과거에 이미 수행했던 기법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개인 정보 보호 문제도 극복해야 한다. 전 구글 엔지니어인 브라이언 케니시와 오스틴 차우는 최근 디스커넥트(Disconnect)라는 신규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인터넷 공간에서 웹브라우징을 할 때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막아준다. 매주 40만명이 신규 가입하고 있을 정도로 관심을 끌고 있다. 결국 '프라이버시 보호'와 '편리한 생활' 사이의 중간점을 어떻게 찾느냐가 디지털 마케팅 기법의 성공 여부를 결정할 전망이다. 이에 대해 허핑턴포스트의 아리아나 허핑턴 CEO는 "요즘은 자신의 디지털 자아를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며 "자기 표출이 새로운 놀이거리가 됐다"고 긍정적인 전망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