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잘하는 학교는 생활지도도 잘하는 학교인 줄 알았는데…."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사는 정혜영(가명·64·자영업)씨는 지난주 교육과학기술부가 공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초등학교 4학년 손녀딸이 다니는 A초등학교가 전국에서 "학교폭력을 경험했다"는 학생 응답이 가장 많이 나온 초등학교 50위 안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A초등학교 주변은 중대형 아파트 단지와 빌라가 늘어선 주거지역이다. 학교 앞 상가에 보습학원이 즐비하고, 가까운 지역에 눈에 띄는 퇴폐업소나 컴컴한 우범지역도 없다. 더구나 이 학교는 성적 기준으로 봐도 100개 학교 중 22등 하는 중·상위권이다(학업성취도 상위 22%). 정씨는 "솔직히 학교폭력은 열악한 동네 일인 줄 알았다"면서 "우리 동네처럼 생활수준이 높고 교육열이 강한 곳마저 학교폭력이 횡행할 줄 몰랐다"고 했다.

폭력 많은 학교 40% 이상이 공부 잘하는 학교

교과부가 실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는 공부 잘하는 학교도 학교폭력 무풍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①공부 잘하는 학교에서도 학교폭력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뿐 아니라 ②부모와 교사 눈에는 멀쩡해 보이는 학교도 당사자인 아이들에겐 '일진이 군림하는 정글'인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전국 초·중·고등학교 가운데 "학교폭력을 당한 적 있다"는 응답이 많이 나온 학교를 50위까지 추려서 학업성취도와 대조해 보니, 최소한 열 곳 중 네 곳이 학업성취도가 평균보다 뛰어났다.

초등학교의 경우 "학교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많은 학교 50위 안에서 22곳이 중·상위권 이상이고(학업성취도 40% 이내), 그중 8곳은 상위권 학교였다(20% 이내). 중학교는 50위 안에 든 학교 중 절반이 넘는 26곳이 중·상위권 이상이었고, 그중 7곳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의 경우 50위 안에 든 학교 중 20곳이 중·상위권 이상, 그중 7곳이 상위권이었다.

"우리 학교에 일진이 있다"는 응답이 많이 나온 학교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였다. 초등학교의 경우 50위 안에 든 학교 중 23곳이 중·상위권 이상이고, 그중 8곳이 상위권이었다. 중학교는 50위 안에 든 학교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30곳이 중·상위권 이상이었고, 그중 10곳은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의 경우 50위 안에 든 학교 중 17곳이 중·상위권 이상, 그중 7곳이 상위권이었다.

잘사는 동네도 안전하지 않았다

서울 시내 25개 자치구 가운데 "학교폭력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많이 나온 다섯 곳 중 두 곳이 강남구(4위)와 송파구(5위)였다. 양천구(11위)와 서초구(12위) 역시 학교폭력을 겪은 아이의 비율이 서울 전체 평균을 웃돌았다. 사회기반시설이 충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지역, 고학력·고소득 학부모가 많고 사교육 열풍이 강한 지역에서 오히려 학교폭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 지역 경찰서 간부 A씨는 "요즘 일진은 옛날 일진과 다르다"고 했다. 옛날 일진은 공부도 못하고 교실을 장악하지도 못해 학교 안에서는 숨죽이고 있다가 학교 밖에서 설쳤다. 반면 요즘 일진은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해 학교 안까지 장악한다는 것이다.

'하늘교육' 임성호 대표는 "결국 핵심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동네가 잘살건 열악하건 누구도 '내 아이는 안전하다'고 자신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