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 일본 도쿄. 4월 시작한 포항제철소 공장 건립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일본 미쓰비시의 설비 담당자는 박태준 당시 사장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없다"며 설비 발주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박태준은 굴하지 않았다.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피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을 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박태준은 "하루 무조건 700㎥ 이상 콘크리트를 타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군복 차림으로 하루 3시간씩만 눈을 붙이고 쉴 새 없이 현장을 독려했다. 박태준의 철강 신화는 이렇게 막이 올랐다. 그는 1970년 4월 공사를 시작한 지 3년 2개월 만인 1973년 6월 첫 쇳물을 뽑아냈고 25년 재임하는 동안 포스코를 조강 생산 2100만t급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다.

와세다 공대 입학… 6·25 참전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태어난 박태준은 1933년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와세다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한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했다. 이후 1948년 육사의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갔다. 6·25전쟁 때에는 포천 1연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박태준은 생사기로의 순간을 맞았다. 1950년 6월 27일 박 회장은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교 부근에서 중대장 10명 중 그를 포함해 단 두 명만 살아남아 부대원들과 전선을 지켰다. 소련제 탱크의 소음을 들으면서 최후 순간을 각오했지만 이때 육군본부로부터 '한강 이남에 집결하라'는 전문을 받고 후퇴했다.

전쟁이 끝난 뒤 박태준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친척 어른 소개로 부인 장옥자씨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한 그녀는 신혼 휴가 뒤 서울로 떠나는 남편에게 첫 선물을 건넸다. 자기 은사인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 그것이 박태준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만난 것이었다.

박정희 "자네가 제철소를 맡아"

1964년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다. 박정희는 이미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경영 능력을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를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해외 출장을 나갈 기회가 있으면 선진 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박태준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1965년 6월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렀다. 박정희는 박태준으로부터 일본 철강업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거야.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은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라고 말했다.

대일 청구 자금으로 포스코 건설

박태준은 포항제철 건립에 착수했지만 문제는 1억달러에 이르는 자금이었다. 박태준은 1969년 1월 한국과 워싱턴을 오가며 세계 5개국 8개 회사의 연합(KISA)과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퇴짜를 맞았다. 그는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하와이 해변을 걷다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활용해 제철소를 지어야겠다는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했다. 그는 국제전화로 박정희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날아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 지원 협상을 벌였다.

박정희 "임자한테 내가 졌어"

종합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설립할 것인가도 문제였다. 박정희는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고 주장했고, 박태준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고 주장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체험했기에 민간 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와대에서 세 차례나 토론이 있었다. 줄담배를 태운 박정희가 마침내 말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박정희는 이후 박태준에게 전권을 준다는 의미로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 이른바 종이마패를 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