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화학소재업체 SSCP희성전자와 공동으로 종이에 글자를 인쇄하듯 투명 유리에 전자회로를 찍은 새로운 기판을 시험 중이다. 희성전자는 연 매출 3조4000억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 백라이트유닛(BLU·액정화면 뒤에서 빛을 쏘아주는 부품)업체다. 희성전자가 새 기판 공정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골칫덩어리였던 화학 쓰레기도 줄이고 원가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 필요한 회로만 찍어내면, 전극 재료는 30~50%, 세척액은 최대 80%까지 절감할 수 있고 부식용액은 아예 필요 없다.

오정현 SSCP 사장은 "태양광이나 풍력만 녹색 제품이 아니다"며 "사용하는 양과 버리는 양 자체를 줄이는 공법 자체가 곧 '그린(green)'"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부품도 '신문처럼' 인쇄하라

전자소자나 부품을 인쇄공법으로 만드는 '인쇄전자(printed electronics)'가 주목받고 있다. 은이나 구리 등 전기가 통하는 전자잉크로 유리나 박막(薄膜) 필름에 회로를 인쇄하는 기판이 대표적인 인쇄전자 분야. 기존 기판은 유리 전체에 은박막을 만들고 원하는 패턴만 남기고 나머지는 깎아낸 후 전자부품을 올려놓는 일종의 3차원 구조였다. 5~6개의 복잡한 공정을 거치다 보니, 재료도 많이 들고 깎아내 버리는 화학 쓰레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급속히 발달하고 있는 인쇄전자 기법을 활용하면, 신문을 찍는 것처럼 회로를 유리에 인쇄하는 1개 공정만 거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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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 부품업체인 잉크테크는 지난 8월 노르웨이 업체인 신필름(Thinfilm)과 손잡고 세계 최초로 메모리 반도체를 인쇄방식으로 제조하는 데 도전장을 내밀었다. 기존 반도체 공정보다 단순하기 때문에 가격도 40% 이상 저렴하고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다. 삼성SDI도 2007년에 설립한 공장부터 화폐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오프셋(offset) 인쇄 기술을 평판디스플레이 생산공정에 도입해 재료 사용량을 절반으로 줄였다. 일본 샤프는 액정디스플레이(LCD) 부품인 착색여과기(컬러필터)에 잉크제트 인쇄 방식을 적용했다. 그동안 적색·녹색,·청색 컬러필터를 생성하려면 각 6공정을 3번씩 18공정을 거쳐야 했으나 인쇄 방식으로 공정을 3단계로 줄였다.

2년 후면 100억달러 시장

시장조사기관인 아이디테크이엑스(IDTechEX)는 인쇄전자 시장이 2014년이면 전 세계 100억달러를 돌파, 2025년이면 현재 반도체 시장의 절반인 16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지식경제부도 인쇄전자를 미래산업 선도 기술 6대 후보과제로 선정하는 등 인쇄전자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 9월에는 전 세계 전기전자 분야 표준을 제정하는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에 인쇄전자 기술위원회(TC) 설립도 주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윤상직 지식경제부 차관은 "한국 주도로 TC를 신설하기는 처음"이라면서 "이는 올림픽에서 경기 종목 하나를 추가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로 한국이 표준화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경부는 내년에 인쇄전자 부문에 2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이다.

"아직 확실한 강자 없어"

인쇄전자 공정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성능과 집적도가 높은 원천 소재 개발이다. 하영욱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영화 '해리포터'에서 둘둘 마는 신문부터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인쇄전자의 적용범위는 무궁무진하지만, 소재 개발은 더딘 편"이라면서 "전 세계 3000개가 넘는 기업과 연구기관이 뛰어들었지만 확실한 강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잉크테크 조현남 부사장은 "좋은 소재 개발에 성공했더라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데는 또 다른 노하우가 필요하다"면서 "최적의 장비도 개발해야 하고 불량률도 낮춰야 하기 때문에 싸움은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