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맞벌이 강모(41)씨는 지난 2009년 말 서울 성동구 D아파트(102㎡)를 2억7000만원에 전세 놓고 서초구 R아파트로 이사했다. 거의 같은 평형대로 이사를 갔는데 전세금으로 5억원 넘게 줘야 했다. 5억원이면 강씨가 가지고 있는 D아파트의 매매가에 육박한다. 주변에선 무리라고 걱정했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딸의 학군(學群)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강씨처럼 자기 집이 있으면서도 남의 집에서 전·월세를 사는 '무늬만 세입자'가 급증하고 있다. 통계청의 '2010 가구 총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무늬만 세입자' 가구주는 114만명이었다. 관련 통계 작성이 처음 시작된 5년 전(67만명)과 비교해 70% 늘어난 것이다.

'강남 경제권'에 집중

수도권에서 '무늬만 세입자'의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서울의 경우 전체 세입자 중 무늬만 세입자 비율이 5년 새 6.9%포인트(2005년 10.5%→2010년 17.4%), 경기도는 6%포인트(12.3%→18.3%), 인천은 5.1%포인트(10.6%→15.7%) 각각 늘었다.

주택시장 안정지표인 '자가 거주율(자기가 소유한 집에 사는 비율)'은 크게 낮아졌다. 지난해 수도권 825만가구 가운데 383만가구만 자기 집에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가 거주율이 46.4%에 그쳐 2005년(50.2%)보다 3.8%포인트 하락했다. 정부의 주택 공급정책이 양적 확대에 치우쳐 주택 보유율은 늘렸지만 정작 늘어난 주택들이 실(實)소유주를 찾아가진 못한 것이다.

광역시 고급 주택지에도 많아

전국 시·군·구 중 '무늬만 세입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용인 수지(34.6%)였다. 과천(34.3%), 서울 서초(31.2%), 성남 분당(29.5%), 안양 동안(27.5%), 고양 일산서(27.0%), 서울 강남(26.4%), 용인 기흥(24.9%), 의왕(24.1%), 서울 양천(24.0%)도 그 비율이 높았다.

이 지역의 공통점은 학군이 좋거나 살기 편리한 신(新)도시라는 점이다. 장성수 주택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들 지역을 '범(汎)강남경제권'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남경제권'에 대한 주택 수요는 많지만 여간 돈이 있지 않고서는 집을 사기가 어려워 세입자로라도 그 지역에 산다는 것이다. 부산 해운대구(15.3%), 대전 유성구(19.5%), 대구 수성구(18.9%), 울산 남구(14.9%) 등 각 광역시의 고급 주택지에도 '무늬만 세입자' 비율이 높았다.

전·월세시장 뇌관으로 작용

문제는 이들이 전세금 상승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빌라(63㎡)를 전세(6500만원) 주고 강북 미아동 아파트에서 전세 사는 회사원 최모(40)씨는 올해 말 계약이 끝나면 세입자에게서 전세금을 2500만~3000만원 정도 올려 받을 계획이다. 최씨가 사는 아파트 전세금을 올 초에 3000만원 올려 줬기 때문이다.

함영진 부동산써브 실장은 "전세금이 비싼 지역에서 가격이 급등하면 다른 곳에 자기 집이 있는 세입자들은 이를 전가해버리는 연쇄반응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학군이나 생활 여건 때문에 '무늬만 세입자'를 자청한 사람들은 전세금이 오른다고 해서 값이 싼 지역으로 이사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에게 인상분을 최대한 떠넘기기 쉽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