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갑을(甲乙) 관계 없는 곳에서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중소 전산개발업체 A사(社)는 최근 서울시청 출연기관인 서울디자인재단이 발주한 인터넷 교육시스템(DB) 구축사업에서 명함도 못 내봤다.

정부는 지난해 8월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공공소프트웨어 사업 중 40억원 안 되는 규모엔 대기업이 참여할 수 없도록 법을 고쳤다.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각종 편법이 끼어들었다. 서울디자인재단 발주사업은 20억원 규모여서 대기업이 들어올 수 없게 돼 있었지만 발주처가 제안 요청서에 예외규정을 만들었다. 교육대상 맞춤별 디자인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대기업이 입찰할 수 있게 길을 열었고 결국 대기업 S사가 입찰해 낙찰받았다. 실제 시스템 구축 작업에는 중소 하도급 업체들이 동원됐다.

A사 대표는 "아무리 대기업에서부터 1·2·3차 하도급업체로 이어지는 부당한 먹이사슬을 끊으려 해도 현실에서는 노예 같은 갑을 관계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며 "다소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중소기업이 실력을 발휘할 공정한 기회를 많이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삼성전자와 삼성전자 협력사 모임 협성회의‘동반성장 협약 체결식’. 대기업과 1차 협력업체 간의 불공정 관행은 개선되고 있지만 2차, 3차 협력업체로 내려갈수록 부당 거래의 사각(死角)지대가 많이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대로 아예 중소기업이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사업도 있다. 지난 6월 스포츠토토는 '체육진흥투표권 차세대 시스템 구축 사업'(최대 161억원) 입찰 공고를 내면서 '3년간 단일 건으로 160억원 이상의 온라인 복권이나 금융시스템 구축 실적이 있는 업체'로 자격 제한을 했다. 이런 조건 때문에 대기업인 SK C&C와 삼성SDS만 입찰할 수 있었고 SK C&C가 낙찰받았다.

이런 판국이니 중소업체는 대기업에 기생하는 체제에 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직원들의 임금도 하도급 단계가 내려갈수록 턱없이 적어진다. 소프트웨어 하도급업체에서 5년 이상 프로그래머로 일한 김모(32)씨는 "소프트웨어 업계 종사자는 갑을병정 4단계로 신분이 나뉜다"며 "갑은 프로그램 발주사 직원, 을은 사업을 수주한 대기업 계열 SI업체 직원, 병은 을에게 전산개발 인력을 공급해주는 용역회사 직원, 정은 병이 급할 때 데려다 쓰는 일용직"이라고 했다.

자동차산업처럼 다단계 공정이 불가피한 산업에서 2·3차 협력회사, 즉 먹이사슬 밑바닥의 고충은 훨씬 더 크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달 협력업체의 납품단가를 일방적으로 깎은 파브코에 대해 2억5483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대구에 있는 자동차 엔진진동장치 생산업체 파브코는 완성차 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1차 협력사인데 이 회사는 2·3차 협력업체들에 거래규모별로 2~10%의 목표 공정개선율(단가인하율)을 일방적으로 설정했다가 적발됐다. 이처럼 당국에 걸리는 것보다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많다.

경기도에서 통신설비 공사를 하는 중소기업 이모 사장은 "나는 먹이사슬 속에서 산다"고 말했다. 최근 경기도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5억원짜리 통신설비 공사 공고를 냈는데 4억3500만원 선에 낙찰받은 업체는 공사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 사장은 "낙찰받은 업체는 우리 회사에 3억원에 공사를 넘기고 그냥 중간에서 1억3000만원 정도를 챙겼다"면서 "그 업체는 이렇게 하는 게 불법인 줄 알지만 신경도 안 쓴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2억6000만원어치 자재 사고, 4000만원으로 공사를 해야 하니 10명이 필요한 일에 5명만 쓰고 밤샘 작업을 해 겨우 수지를 맞추고 임금도 깎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에 따르면 근속기간 4년차 직원의 임금이 완성차 직원은 연봉 5439만원인데 1차 부품업체 직원은 3048만원, 2차 부품업체는 2288만원에 불과하다. 2차 협력업체 직원의 임금은 1차 협력사의 3분의 2, 완성차 업계의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일자리(임금 근로자)의 90% 이상을 중소기업이 창출해내고 있다. 고용과 소득, 소비의 상당 부분을 중소기업이 지탱하는 구조다. 우리 사회가 고민하는 대·중소기업 간의 동반성장은 궁극적으로 산업 전반에 퍼져 있는 약육강식의 비정상적인 갑을 관계를 깨는 일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기중앙회 조유현 정책본부장은 "동반성장의 최종 목적지는 먹이사슬 피라미드 밑단의 중소기업인들"이라며 "이들이 온기를 느껴야 산업 생태계가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 4.0

'자본주의4.0'은 소프트웨어 버전(version)처럼 진화단계에 따라 숫자를 붙일 때 네 번째에 해당하는 자본주의라는 뜻.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1.0), 1930년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수정자본주의(2.0), 1970년대 시장의 자율을 강조한 신자유주의(3.0)에 이어 등장했다.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고 선두에 선 대기업이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도록 하되, 중소기업에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