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업의 회의실. 20대 직장 여성을 겨냥한 여름 신상품의 마케팅 방안을 두고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20대 직장 여성이 많이 모이는 서울 명동 거리에서 길거리 홍보 행사를 하자." "명동은 한물갔다. 신사동 가로수길이 좋다." 그 순간 한 여자 신입 사원이 손을 든다. "왜 그렇게 어렵게 하죠. 그냥 '허브(hub)'만 찾아 공략하면 되잖아요." 신입 사원은 말 한마디만 하면 순식간에 수많은 20대 직장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골라 제품을 홍보하자는 것이다.

허브는 인간 사회처럼 복잡한 네트워크에서 유난히 다른 구성 요소들과 많이 연결된 중심 요소를 말한다. 사람으로 치면 '인맥(人脈)의 달인'인 셈. 최근 기업의 마케팅에서부터 교통 정책과 선거 전략 수립, 심지어 생물학 연구에서도 이 같은 '허브'를 찾는 게 대세가 됐다.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가 대형 TV 화면을 통해 전 세계 인터넷 네트워크의 연결 현황을 보여주고 있다. 선이 집중돼 있는 부분이 네트워크 허브(중심축)다.

그 시초에 한국인 과학자가 있다. KAIST 물리학과 정하웅(鄭夏雄·43) 석좌교수는 1998년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 노스이스턴대에 연구교수로 갔다. 거기서 훗날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링크'를 쓴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Barabasi) 교수와 함께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을 창안했다.

"원래 둘 다 복잡한 도형이 단순한 구조의 반복이라는 '프랙탈' 복잡계가 전공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바라바시 교수가 '수많은 웹페이지가 어떤 식으로 연결됐을까'하고 묻더군요. 전공이 엄청나게 많은 데이터를 분석하는 통계물리학이라 '뭐, 알아내기 어렵지 않겠다'고 답했죠.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엄청난 데이터와 씨름한 끝에 항공편이 몰리는 허브 공항처럼, 웹(WWW)에도 다른 웹페이지와 연결된 수가 월등히 많은 허브가 있음을 최초로 밝혀내 1999년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전 세계 수많은 인터넷 주소에도 역시 허브가 있음을 밝혀내 네이처 표지 논문으로 발표했다. 2001년에도 역시 네이처에 세균 내부의 단백질에도 허브가 존재한다고 발표했다. 3년 연속 각각 다른 주제로 세계 최고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것.

반응은 뜨거웠다. 물리학, 생물학 가리지 않고 전 분야의 과학자들이 세상의 모든 복잡한 곳에서 허브를 찾기 시작했다. 각국 정부는 테러 공격에 취약한 사회 인프라의 허브를 어떻게 보호할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경영학자들은 마케팅 목표를 불특정 다수에서 허브로 돌렸다.

정 교수는 "처음엔 X선 촬영하듯 복잡계 네트워크의 구조를 알아내는 연구를 주로 했다면, 지금은 복잡계 네트워크가 어떻게 변할지, 또 통제가 가능한지 알아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연구 성과가 2008년 발표한 도로 교통 네트워크 분석이다. 정 교수는 미국 보스턴영국 런던의 도로 네트워크를 분석해 교통 체증을 막으려면 도로를 신설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도로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름길을 없애면 차량이 분산돼 흐름이 더 좋아진다는 것. 이 논문은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주목할 만한 과학 논문으로 선정해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휴대전화 통화 기록을 분석하면 지금도 어떤 사람이 특정 시간에 어디에 있을지 80% 정확도로 알 수 있습니다. 부품 수만 개로 이뤄진 자동차가 핸들, 가속기, 브레이크만으로 움직이듯, 사회 네트워크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곳을 찾으면 손쉽게 네트워크를 조절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국회의원 인맥에서부터 세포 내부 물질대사, 음악과 미술 작품까지 말 그대로 '복잡한 모든 것'을 분석하고 있다. 정 교수는 한 편만 내도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네이처' 논문을 3년 만에 다섯 편이나 쓰는 등, 지금까지 세계 최고 수준 학술지에 80여 편의 논문을 썼다. 그의 논문은 지금까지 다른 학자의 논문에 8000회 이상 인용될 정도로 복잡계 네트워크 연구에서 '고전'이 됐다. 참고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의 평균 논문 인용 지수는 5508회다.

정 교수는 "과학을 하게 된 것은 어릴 때 꿈인 우주여행을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신체 조건으론 우주 비행사는 힘들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과학자가 되면 우주선에 탈 수 있겠다 싶었죠." 훗날 우리나라가 개발한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도 허브가 있다"고 외치는 모습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