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 시절 주식투자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지난 5월 결혼한 서모(32)씨. 부부는 일심동체라지만 가지고 있던 주식을 팔아 1000만원이 조금 넘는 '비자금'을 조성했다. 결혼 초에는 예상 외로 돈 쓸 일이 많다는 집안어른의 충고에 과감하게 딴 주머니를 찬 것이다. 문제는 돈을 어떻게 숨길지였다. 서씨는 아내와 같은 은행을 이용하기 때문에 아내가 서씨의 공인인증서를 갖고 계좌를 조회하면 금세 딴 주머니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마침 그 은행에 근무하는 대학 선배에게 해결책을 물었더니 "비밀계좌 서비스를 이용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씨는 은행 지점에는 계좌기록이 남지만, 인터넷에서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계좌가 있다는 말에 무릎을 쳤다.

최근 금융가에서 아내 몰래 비상금을 숨길 수 있는 비밀계좌 서비스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남편이 비밀통장을 등 뒤에 숨긴 채 아내를 바라보는 장면을 우리은행 직원들이 재연했다.


비자금, 장롱에서 은행 계좌로

아내 몰래, 남편 몰래, 자식들 몰래. 돈을 숨겨야 결정적인 순간에 무리 없이 생색을 낼 수 있는 시대다. 이 때문에 시중은행에선 인터넷상의 계좌 기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비밀계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장롱이나 구두장, 화단 밑에서 구차한 세월을 보내던 비상금이 이젠 이자까지 받으면서 은행금고에 모셔지고 있는 셈이다.

현재 국민, 우리, 신한, 하나, 기업은행 등 거의 모든 시중은행이 비밀계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비밀계좌를 운영하는 은행들은 말 그대로 고객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수신고나 가입자 규모를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비밀계좌에 대한 별도의 통계를 잡는 것이 큰 의미도 없다. 비상금 규모가 워낙 천차만별인 데다 돈을 맡기는 기간도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계좌 수로만 보면 전체의 0.3% 내외가 이용하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최근 2~3년 새 이용고객이 급증하고 있지만 은행별로 정확한 통계를 내는 곳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비밀계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터넷이나 모바일뱅킹으로는 입출금 내역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계좌에도 '급'은 있다. 숨겨지는 정보의 범위와 강도에 따라 단순한 인터넷계좌 숨기기, 보안계좌, 시크릿뱅킹으로 나눌 수 있다.


보안 강도 따라 '안전성' 높지만

단순히 인터넷뱅킹을 할 때 계좌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인터넷계좌 숨기기'는 가장 낮은 수준의 비밀계좌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숨김기능을 사용하면 계좌가 나타나지 않지만, 원상회복시키면 다시 인터넷뱅킹을 할 수 있다. 국민·신한·우리은행 등 대부분의 시중은행에서 이 같은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본인의 인터넷뱅킹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이 숨김계좌 메뉴를 누르면 계좌가 발각되는 것이 단점이다.

이보다 수준이 높고, 가장 이용빈도가 높은 것은 '보안계좌'다. 이는 원래 인터넷 뱅킹에 따른 해킹 피해를 우려하는 고객을 위해 만든 서비스지만 당초 의도와 달리 최근에는 일반인이 주로 사용한다. 보안계좌는 인터넷이나 콜센터 등 직접 은행직원을 대면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거래가 불가능하고, 인터넷상에 계좌정보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은행 점포의 자동입출금기를 통해서는 통장의 돈을 찾을 수 있다.

가장 강력한 보안 강도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 하나은행 등이 내놓은 시크릿계좌 서비스다. 시크릿계좌는 예금조회와 인출, 해지를 모두 통장을 가입한 특정한 영업점에서만 할 수 있다. 따라서 인터넷뱅킹을 통해서는 아예 계좌정보가 드러날 일이 없는 셈이다.

문제는 보안 강도가 세지는 것에 비례해 통장에서 돈을 빼는 절차 역시 까다롭다는 것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지점장의 직접 확인을 받아야 돈을 찾을 수 있는 계좌는 급하게 돈을 찾을 때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며 "미리미리 가입과 해지, 인출 규정을 확인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비밀계좌 서비스의 개념과 조건은 은행별로 큰 편차가 없다. 하지만 세부적인 가입과 해지, 인출조건 등은 은행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가입시 한 번쯤 확인해 놓는 것이 좋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비밀계좌를 특별한 서비스로 생각하기보다 고객에게 주는 거래조건 중 하나로 보는 경우가 많다"며 "고객수요가 늘고 있어 관련상품이 세분화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