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권에서 중소 기계 부품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최근 거래하는 대기업 간부 B씨로부터 뜬금없이 "딸이 결혼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A씨는 얼마나 보내야 할지 고민하다가 500만원을 부조했다. 그가 평소 부품을 공급하는 원청업체 회사 구매담당 간부들에게 돈을 건네는 명목은 접대비, 자녀 차량 구입비, 자녀 결혼식 축의금 등 다양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적한 기업의 부정은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직원 관리가 철저하기로 소문난 삼성이 조직 문화에 위기감을 느낄 정도라면 다른 기업은 훨씬 더하다는 게 주요 기업 간부들의 이야기다.

실제로 각종 비리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는 기업체 임직원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대부분 기업 임직원이 연루되는 횡령과 배임죄로 실형이 선고된 사건이 2007년 1494건에서 2008년 1596건, 2009년엔 1728건으로 2년 새 16%가량 증가했다.

국내 5대 로펌의 한 중견 변호사는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사회적인 감시에 노출돼 있어 대놓고 비리를 저지르기가 점점 어렵다"며 "민간 기업 영역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비리는 공공 부문의 비리보다 그 규모와 정도가 훨씬 크고 심각하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발생하는 비리는 납품단가 후려치기 같은 회사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른바 '갑을(甲乙) 관계'를 악용한 개인의 비리도 심각하다. 한 기계업체 사장은 "납품권을 무기로 이른바 '몰아주기'로 이익을 챙기는 대기업 구매 담당자도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부품회사 가운데 몇 년 만에 20~30배씩 매출이 성장하는 회사가 있다고 한다. 구매 담당자가 그 회사에 집중적으로 물량을 주는 대신 차명으로 그 회사의 지분을 받는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비리에 가담하는 경우도 있다. 2년 전 KT는 자체 감찰을 통해 자사와 협력업체 직원 178명을 적발해 검찰에 고발했다. 당시 비리에 연루된 직원은 대리부터 상무까지 직급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은 협력업체에 공사를 맡길 때마다 뒷돈을 받고 이렇게 받은 돈을 다시 매달 수백만원씩 직속 상관에게 인사 청탁 대가로 상납하거나 비리 무마에 사용했다.

한국기업윤리경영연구원 박종선 원장은 "그동안 이룬 경제력에 비해 기업인들의 윤리의식은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다"며 "지속적으로 윤리의식을 고취시켜야 기업이 바뀌고 한국 사회도 한 단계 더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