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0시 서울 상암동 팬택 사옥 13층 중앙연구소. 퇴근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사무실에는 불이 훤히 켜져 있고 연구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달 초 출시 예정인 스마트폰 '베가 레이서'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서였다.

사무실에는 자판기 커피가 말라붙은 종이컵이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메시지 에러, 어떻게 됐지?" "화면 전환문제, 확인했습니다" 같은 말이 빠르게 오갔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연구원들의 책상에는 군대 내무반처럼 칫솔과 컵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한 여성 연구원은 "따로 이 닦을 시간이 없어서 책상에 앉아서 칫솔질을 한다"고 말했다.

좌. 밤중에도 사무실마다 불이 켜져 있는 서울 상암 동 팬택 사옥. 우 위. 팬택 연구원들이 사무 실에서 제품 디자인 회의 를 하고 있다. 우 아래. 팬택의 임성재 마케팅 본부장이 지난달 20일 신 형 스마트폰‘베가 레이 서’를 발표하고 있다.

◆"무조건 더 빠르게 만들어라" 밤을 잊은 팬택연구소

연구원들의 '날밤 까기(철야 근무)'는 지난 4월부터 시작됐다. 이전까지는 정상적인 스케줄에 맞춰 개발이 진행됐다.

그러던 중 삼성전자가 신형 스마트폰 '갤럭시S 2'에 1.2기가헤르츠(㎓)급 중앙처리장치(CPU)를 사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칩은 팬택이 '베가 레이서'에 쓰려고 했던 것과 같은 성능이었다.

팬택은 삼성전자와 같은 성능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처리 속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CPU 개발을 담당하는 미국 퀄컴에서 더 빠른 CPU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개발 일정을 미룰 수는 없었다. 급변하는 시장 상황상 출시를 미뤘다가는 제품의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남영 책임연구원은 "정말 난감했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에게 '아빠는 6월까지 집에서 볼 수 없을 거야'라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철야 근무가 일상화됐다. CPU와 스마트폰 개발을 동시에 진행하는 강행군이었다. 서울의 팬택에서 개발 자료를 보내면 태평양 반대쪽의 퀄컴에서 CPU 시제품을 만들고 이를 다시 팬택에서 스마트폰에 적용해보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팬택과 퀄컴은 드디어 세계 최초로 1.5㎓급 CPU를 내장한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문지욱 연구소장은 "콧대 높은 퀄컴 연구원들까지 야근시킨 회사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며 "성능만큼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연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긴축경영 하면서도 연구 인력은 계속 늘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팬택은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사업방향을 빨리 전환한 전략이 주효했다.

팬택은 지난해 4월 '시리우스'를 시작으로 스마트폰 7종을 연달아 내놓았다. 빠른 대응 덕분에 국내 스마트폰시장에서 점유율 3위를 차지했다. 애플의 '아이폰4'와 삼성전자의 '갤럭시S'가 통신사들의 전폭적인 마케팅 지원을 업고 판매되는 상황에서 비교적 선전한 것이다. 팬택은 국내의 성공을 바탕으로 올해 미국일본 시장에도 신형 스마트폰을 출시할 예정이다.

팬택은 2007년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 긴축경영을 하면서도 연구원은 계속 늘렸다. 2007년 말 1155명이던 연구원은 지난 5월 1533명이 됐다. 비연구직 직원보다 100명 이상 많은 숫자다.

밤 1시가 넘어도 연구소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몇몇 연구원들은 의자에 잠깐 기대 졸다가도 이내 일어나 작업을 이어갔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은 "우리가 회사가 작아도 사람이나 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며 "다들 머리에 쥐나도록 일하니까 제품 성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