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동에서 차로 15분쯤 달려 경인고속도로 광명IC를 빠져나가자 탁 트인 벌판이 눈에 들어왔다. 광명시 노온사동이라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광명 도심으로 연결되는 4~6차로 도로변에는 '광명시흥보금자리주택(예정)지구'임을 알리는 대형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도로변에는 낡은 건물 외벽에 식당과 화원·부동산중개업소 간판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 안쪽으로는 비닐하우스가 빽빽했다. 이곳에서 만난 S공인중개사 이모 대표는 "지구 지정 1년이 넘었지만 보상이 언제 시작될지도 모른다"면서 "요즘엔 집이나 땅 사겠다는 문의도 완전히 끊어졌다"고 말했다.

경기 광명시흥지구는 지난해 3월 말 3차 보금자리주택지구로 선정됐다. 부지면적이 1736만㎡(525만평) 규모로 분당신도시와 맞먹는 사실상의 '신도시'로 건립 주택 수만 9만5000여가구에 달한다. 하지만 사업 시행자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9조원으로 추산되는 보상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후속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LH 관계자는 "언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를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고 말했다.

4대강 살리기와 함께 이명박 정부의 최대 국책사업인 보금자리주택이 삐걱거리고 있다. 사업을 책임져야 할 LH의 자금난이 심화돼 보상과 착공 지연은 물론 지구 지정 이후 1년 가까이 사업 계획조차 수립하지 못한 곳도 있다.

토지보상 지연 등의 문제로 정부의 보금자리주택 사업이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15일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서 열린 서울 강남 보금자리주택 기공식 모습.

2년간 착공 물량 2000가구도 안 돼

"서민들에게 내집 마련의 꿈과 희망을 주겠다."

이명박 정부가 보금자리주택정책을 처음 발표한 건 2008년 9월. 당시 시세보다 15% 이상, 최대 반값에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서민들은 환호했다. 실제로 2009년 9월 처음 선보인 서울 강남과 서초지구 아파트는 분양가가 3.3㎡(1평)당 1000만원대로 시세의 반값이었다.

정부는 2018년까지 10년간 전국에 보금자리주택 150만가구를 지을 계획이다. 추정 사업비만 120조원으로 4대강 살리기 사업(22조원)의 6배에 육박한다. 수도권은 일정을 6년이나 앞당기기까지 했다. 2012년까지 목표 물량인 32만가구를 짓겠다는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서울 주변 그린벨트 중에서 보존가치가 낮은 곳을 풀면 '싸고, 빠르게' 주택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그런데 2년6개월이 지난 현재 수도권 보금자리주택은 공급 목표를 한참 밑돌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2008~2012년까지 4년간 연평균 8만가구를 건설(사업 승인 기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사업 승인을 받은 물량은 9만5000가구. 당초 목표(16만가구)의 60%에 그치고 있다.

착공한 물량은 더 적다. 시범지구인 서울 강남과 서초지구 두 곳의 1994가구뿐이다. 현 추세라면 사실상 MB정부 마지막 해인 내년 말까지 입주 가능한 물량은 4000여가구에 불과할 전망이다. 정부 내에서조차 "이러다간 '공약(空約)'으로 끝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잇따른 갈등으로 줄줄이 사업 지연

그나마 현재 추진 중인 사업이 보상문제 등으로 곳곳에서 차질을 빚고 있어 향후 전망도 밝지는 못하다. 성남 고등지구(3800가구)는 작년 5월 지구 지정됐지만 1년여 동안 지자체와 갈등을 빚으면서 아직 첫 단추도 끼우지 못했다. 2년 전 지구 지정된 하남 미사지구도 LH의 자금난, 원주민과의 보상 갈등으로 당초 지난해 6월에 시작됐어야 할 토지 보상이 12월 말로 늦어졌다. 보상이 끝나야 가능한 본청약은 당초 예정된 9월에는 실시하기 어렵게 됐다.

강남 세곡2, 남양주 진건 등 2차 지구 6곳도 예정대로라면 지난해부터 보상이 시작돼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최근에야 보상을 위한 기초작업을 시작했다. LH 관계자는 "광명 시흥, 하남 감일 등 3차 지구는 현재로서는 올해 보상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보상·착공 지연으로 아파트 입주도 최소 수개월 동안 늦어질 전망이다. 하남 미사지구는 사전 예약 당시 2013년 11월 입주한다고 공지했지만 1년 이상 입주 지연이 불가피하다.

딜레마에 빠진 정부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보금자리주택 공급 목표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목표 달성이 쉽지 않은 데다 민간 건설업계가 '보금자리주택 축소 공급'을 계속 주장해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민간 업계는 "보금자리주택 때문에 민간 분양시장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주택경기 침체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지만 보금자리주택을 포기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최근 슬그머니 일부 정책을 수정하고 있다. 원래 전체 공급물량의 80%였던 사전 예약 물량을 50%까지 줄이고, 보금자리주택지구에 짓는 민간 아파트 비율을 25%에서 좀 더 올리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사전 예약 횟수도 당초 매년 상·하반기 1회씩 2회 실시한다는 원칙에서 시장 상황에 따라 신축적으로 결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상황이다. 정부 관계자는 "권도엽 장관 내정자가 보금자리주택정책 입안을 주도했기 때문에 취임 후 새로운 해법이 나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