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저축은행 사태의 책임공방과 관련, "과거 정권의 잘못일 뿐 현 정부의 책임이 아니다"면서 선 긋기에 나섰다.

금융감독원이 98개 저축은행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사업장 470여곳에 대한 전수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힌 24일,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번 저축은행 부실 사태의 본질은 지난 정권에서 저축은행을 이용한 부실과 비리가 횡행했기 때문"이라고 이번 조사의 배경을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김대중 정권 당시 신용금고를 저축은행으로 바꾸면서 많은 부실이 잉태됐고, 노무현 정권에서는 부동산 PF대출이 무분별하게 늘어나면서 그 부실이 확대됐다"면서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권이나 외압이 작용한 것이 있는지를 이번 조사와 검찰 수사를 통해 파헤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 정부도 책임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실을 파악하고도 이런저런 이유로 처리를 미뤄 사태를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저축은행 부실은 역대 정부 모두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 저축은행으로 명칭 변경

저축은행 사태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김대중 정부다. 김대중 정부는 지난 2000년대 초반 3대 벤처 비리인 진승현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등 상호신용금고와 관련된 주가 조작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상호신용금고가 고객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경영난이 심화하자 2002년 3월 법을 바꿔 상호신용금고란 명칭을 상호저축은행으로 바꿔줬다. 서민 금융기관을 살려야 한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이에 앞서 2001년 1월 저축은행의 예금자보호한도를 시중은행과 똑같은 1인당 5000만원으로 높여줬다.

신용금고라는 낙인이 사라지고 '은행'이란 명칭이 사용되면서 저축은행은 날개를 달았다. 서민뿐 아니라 부자들도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에 5000만원씩 쪼개 맡기기 시작해 예금이 급증한 것이다. 이렇게 밀려드는 예금을 저축은행이 굴릴 곳이 없어서 위험천만한 PF대출에 나선 것이 이번 사태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규모가 시중은행의 1%도 안 되는 저축은행에 대해 은행과 똑같은 예금자보호 한도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비판이 일었지만 진념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금융회사 규모에 따라 예금자보호 한도를 차별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 곳도 없다"고 맞섰다.

노무현 정부, PF 대출 한도 풀어

노무현 정부는 저축은행 사태의 근본 원인인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을 조장했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카드사태 이후 저축은행의 본업(本業)인 신용대출이 연체율 60%까지 급등할 정도로 부실해지자 저축은행의 활로를 열어주기 위해 2006년 8월부터 우량 저축은행에 대해 PF대출 규제를 풀어준다. 한 기업당 대출 한도를 80억원에서 무한대로 풀어주자 저축은행은 PF대출을 크게 늘리기 시작했다. 예전엔 대출 한도 제한 때문에 통상 수백억원이 필요한 PF대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족쇄가 풀린 것이다.

이명박 정부, 저축은행 구조조정 늑장

이명박 정부는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로 부실해지는 저축은행이 속출하자 저축은행이 다른 부실 저축은행을 인수할 경우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인수합병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부실 저축은행을 인수한 대형 저축은행이 동반 부실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현 정부가 정치적 이유로 저축은행 구조조정을 늦췄다는 비판도 나온다. 2008~2009년엔 글로벌 금융위기를 핑계로, 지난해에는 G20 서울정상회의를 핑계로 저축은행에 대한 대수술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과 진동수 금융위원장, 백용호 청와대 정책실장, 최중경 경제수석 등 경제정책 수장(首長)들이 경제정책을 논의하는 서별관회의에 저축은행 대책이 처음 안건으로 올라간 것은 G20 행사가 끝난 지난해 11월 말이었다. 김황식 감사원장이 저축은행 문제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5월 이후 6개월 만에야 정부 공식 의제로 채택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