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드레이퍼 DFJ 대표이사

"최근 10년간 실리콘밸리보단 실리콘밸리 밖에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점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난 3일, 실리콘밸리 간판 벤처캐피탈 DFJ(Draper Fisher Jurvetson)의 창업자 팀 드레이퍼(Timothy Draper) 대표는 실리콘밸리의 벤처 투자 흐름을 진단하며 이같이 말했다. 실리콘밸리를 중앙에 놓고 움직였던 벤처투자의 축이 외부로 이동하고 있다는 게 드레이퍼 대표의 분석이다. 아시아가 부(富)를 축적하면서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의 주요 기관투자가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는 평가도 내놨다.

DFJ는 지난 1985년 팀 드레이퍼 대표가 존 피셔(John Fisher)·스티브 저베슨(Steve Jurvetson)과 함께 설립한 벤처캐피탈이다. 설립자 이름의 앞글자를 따 회사 이름을 정했다. 설립 이후 지금까지 600개가 넘는 벤처기업에 투자해왔다. 중국 검색 포털사이트인 바이두와 세계 최대 인터넷 전화업체인 스카이프, 이메일 서비스 기업 핫메일 등을 스타기업으로 키우며 큰 투자 수익을 거뒀다. 이 중 스카이프와 핫메일은 각각 2005년과 1997년에 이베이와 야후에 인수됐다. 유나이티드온라인·오버츄어·아테나헬스·글램미디어도 DFJ로부터 투자를 받아 성장한 유명기업이다. 최근엔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를 기업공개(IPO) 시켜 큰 이익을 냈다.

DFJ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해 온 벤처캐피탈이다. 전 세계에 보유한 자(子)펀드와 협력사가 총 28곳에 달한다. 한국에선 DFJ아테나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 팀 드레이퍼 대표는 "글로벌화라기 보단 로컬 에브리웨어(Local Everywhere) 전략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최근 주목하는 투자 분야로는 클린테크를 골랐다. 한국의 모바일 기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인터뷰는 DFJ 본사 회의실에서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팀 드레이퍼가 국내 신문과 인터뷰를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아직도 실리콘밸리라고 하면 IT가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최근엔 클린테크와 바이오가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이 지역이 지금까지 지명(地名)에도 없는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IT가 여전히 사업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근 실리콘밸리에선 클린테크 분야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흐름이 본격화됐습니다. 하지만 기술의 밑단을 파고 들어가 보면 IT와 접목됩니다. 바이오 분야도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혁신적이라고 평가받는 바이오 기술도 사실은 IT에 뿌리를 둔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은 바이오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업 영역입니다. 분석은 누가 하나요. 컴퓨터가 합니다. IT기술의 발전 없이는 유전자 분석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면에서 실리콘밸리의 IT는 아직 건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분야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동안 실리콘밸리라는 지역이 가졌던 배타적인 이점들은 사라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동안 벽을 치고 지내왔던 실리콘밸리가 점점 글로벌해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젠 실리콘밸리 밖에도 사무실을 얼마든지 낼 수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큰 불편함 없이 말이죠. 새 회사를 시작하는 곳이 반드시 실리콘밸리일 필요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 DFJ는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글로벌한 벤처캐피탈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메일 서비스 업체인 핫메일에 투자하면서, 벤처캐피탈과 기업과 지리적으로 가까워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실리콘밸리 밖에 있는 매력적인 벤처기업에 투자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검토했습니다. 사람들은 글로벌화를 이룬 벤처캐피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로컬 에브리웨어(Local Everywhere)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DFJ가 세계 각 지역에 있는 만큼 성장 가능성이 큰 여러 지역의 벤처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셈이죠. DFJ가 직접 진출하기 어려운 지역엔 현지 벤처캐피탈과 협력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다 보니 또 다른 투자기회도 생겼습니다. 중국 인터넷 포털업체인 바이두 투자도 글로벌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DFJ가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지역은 어디인가요.
"여전히 실리콘밸리에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수익의 많은 부분이 실리콘밸리 밖에서 생겼다는 것입니다. 중국과 에스토니아에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바이두와 스카이프 투자의 성공 때문입니다. 인도에서도 이익을 냈습니다. 물론 미국엔 성장하고 있는 좋은 회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DFJ는 실리콘밸리 밖의 지역과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더 많은 투자 수익을 거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움직임이 DFJ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로의 투자금 유입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흐름이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기관투자가의 벤처펀드 출자가 줄어들고 대신 아시아의 기관투자가가 빈자리를 메운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미국의 기관투자가들은 오랫동안 정체됐습니다. 몇몇 미국 기관투자가는 아직도 벤처캐피탈 출자를 꺼립니다. 최근 들어 다소 분위기는 나아지고 있습니다. 그 사이 아시아는 어땠나요. 부유해졌습니다. 자금이 풍부해지면서 많은 기관투자가가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을 찾고 있습니다."

-주목하는 투자분야는 무엇인가요.
"클린테크(녹색기술)입니다. DFJ는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 중에서 클린테크 분야에 오랫동안 투자해 온 회사로 꼽힙니다.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에도 투자했고 풍력발전 회사의 지분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투자 비중만 놓고 봤을 땐 IT가 높습니다.

그리고 헬스케어 사업에도 꾸준히 투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신약개발 분야에서 생기는 '정부 리스크'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만약 새로운 암 치료제를 개발했다고 칩시다. 이 치료제가 효과적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후에도 상용화시킬 때까진 약 10억~20억 달러가 더 필요합니다.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5~10년은 더 걸려야 합니다. 투자자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부분입니다."

-한국 시장은 어떤가요. 한국의 어떤 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모바일 분야입니다. 한국은 모바일 분야에서 단연 선두입니다. 한국의 기업이 제시하는 모바일 트랜드를 보고 관련산업 투자를 검토할 정도입니다."

-최근 들어 스타기업이 탄생하는 주기가 짧아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휴렛팩커드(HP)가 10억 달러 규모의 회사로 성장하는 데 걸린 시간은 40년입니다. 오라클은 17년이 소요됐죠. 야후는 2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페이스북은 어떤가요. 1년 만에 10억 달러 가치의 회사가 됐습니다. 스카이프도 페이스북과 비슷합니다. 왜 이렇게 속도가 빨라질까요.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 사이에 기술이 점점 빨리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스타기업이 어떤 회사가 될지 예상하긴 어렵지만, 성장 속도는 페이스북의 성장 속도보다도 더 빨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