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선 벤처기업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초기기업(Start up)이란 말을 대신 사용합니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컴퓨터공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형진씨는 실리콘밸리의 창업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모험의 뉘앙스를 가진 벤처라는 말 대신 발전 가능성에 방점을 찍은 초기기업이란 용어를 실리콘밸리에선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국내 벤처생태계의 발전방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모범 답안이 실리콘밸리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벤처투자 관계자들은 “한국 벤처생태계가 실리콘밸리를 본뜰 수 없는 세 가지의 구조적인 차이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 벤처생태계의 모체, 스탠퍼드대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의 모체(母體)다. 현재 스탠퍼드엔 100개가 넘는 학내 벤처기업이 있다. 교과목 중 벤처기업을 창업하는 수업이 따로 있을 정도다. 디자인 석사과정을 전공하는 김혜진씨는 "학점도 딸 수 있고 결과물이 우수할 경우 바로 창업으로 연결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설명했다.

스탠포드 대학교 전경

창업지원 제도도 잘 갖춰져 있다. 스탠퍼드엔 ‘인큐베이터’라고 불리는 투자 시스템이 있다. 일종의 엔젤투자(갓 창업한 기업에 투자하는 것)인 인큐베이터는 사업성 높은 학내 벤처기업을 선별해 투자금을 대주는 프로그램이다. 최근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응용한 창업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뤄지는 편이다.

실리콘밸리의 독특한 스톡옵션(기업이 임·직원에게 자사 주식을 일정한 가격에 살 수 있도록 부여한 권리) 제도도 눈길을 끈다.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졸업 후 마이크로소프트(MS)나 오라클 같은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성공 가능성이 큰 벤처기업에 취직한다.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입사자들에게 스톡옵션을 보장한다.

회사의 가치가 커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단 기대 때문에 스톡옵션은 구직자에겐 매력적인 조건으로 다가온다. 김형진씨는 “최근엔 페이스북의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창업한 큐오라(Quora)가 스탠퍼드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며 ”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의 지식검색과 유사한 서비스를 하는 회사로 구글 같은 대기업보다 입사 경쟁이 치열하다"고 귀띔했다.

◆ 활발한 M&A

실리콘밸리에선 인수·합병(M&A)이 적극적으로 이뤄진다. 일반적으로 벤처캐피탈은 벤처기업에 투자한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증시에 벤처기업을 상장하거나, 대기업에 회사를 매각한다. 국내 벤처캐피탈의 경우 90% 이상이 기업공개(IPO)를 통해 투자금을 거둬들인다. 실리콘밸리는 반대다. 대부분 M&A를 통해 투자금 회수가 이뤄진다.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오라클 산타클라라 지사

M&A는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대기업인 애플·오라클·시스코·휴렛팩커드(HP)·구글·마이크로소프트가 주도한다. 이들은 매달 1개 이상의 벤처기업을 사들인다. 조성문 오라클 시니어 매니저는 “대기업들은 M&A 관련 부서를 따로 두고 늘 매물을 찾는다”며 ”지적 재산권에 민감한 문화 때문에 대기업은 벤처기업이 가진 기술을 복제하는 것보단 M&A를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 탄탄한 엔젤투자

실리콘밸리 벤처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축 중 한 가지는 엔젤투자다. 실리콘밸리에선 성공한 벤처사업가가 회사를 매각한 후 다시 엔젤투자자로 나서는 사례가 많다. 이들은 갓 문을 연 기업에 자금을 투자하고, 성공 노하우를 전수한다. 이후 벤처기업이 성장해 더 많은 투자금이 필요해지면 벤처캐피탈에 지분을 넘기고 투자금을 거둬들인다. 이후 다시 다른 초기기업에 투자한다. 구글과 페이스북, 트위터가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엔젤투자자로 나섰던 론 콘웨이(Ron Conway)나 마크 서스터(Mark Suster)가 대표적인 엔젤투자자다. 이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수퍼엔젤'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