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생명 광화문 빌딩 앞에 설치된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

5일 서울 중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6층 트리니티 가든. 수십명의 고객들이 보랏빛 하트 모양의 조형물 '세이크리드 하트' 사진을 찍고 있었다. 현대미술의 거장 제프 쿤스의 작품으로, 사람들은 "300억원짜리래" "전 세계에 몇 개 없대" 등 저마다 품평회를 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제프 쿤스에게서 이 작품을 직접 산 뒤, 이를 활용한 '아트 마케팅'을 펼쳐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마케팅을 시작한 4월 29일부터 4일까지 매출이 작년 동기대비 25%, 구매고객 수는 16% 늘어났다. '세이크리드 하트' 작품을 모티브로 삼은 '미네타니 목걸이'는 판매 시작 30분 만에 매진됐다. 신세계백화점 고객전략본부장 장재영 부사장은 "이번 마케팅을 통해 매출은 물론, 차별화된 백화점이라는 이미지 상승효과까지 얻었다"며 "앞으로도 이런 거장들과의 아트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기업들이 유명 작가의 작품을 통해 마케팅 효과도 덩달아 보고 있다. 아트컨설팅 업체 '더 톤' 윤태건 대표는 "기업들이 유명 작가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그 건물이 '랜드마크(대표적인 장소)'로 급부상하는가 하면 기업 이미지 상승효과도 얻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들이 회사 이미지를 좋게 하는 아트 마케팅 차원에서 해외 미술작품을 속속 설치하고 있다. ①동국제강에 설치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브네의 '37.5도 아크'. 철강 기업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②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설치된 제프 쿤스의 '세이크리드 하트'. 최근 방한한 제프 쿤스가 작품 옆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 백화점은 작품의 모티브를 활용해 매장 설치물을 만들었고, 컵·티셔츠·목걸이 등 관련 상품도 판매했다. ③천안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이 구입한 데미안 허스트의 '채러티'. 천안 야우리 백화점과 경영 제휴를 맺고 영업하는 신세계 충청점 앞에 있다.

기업 이미지 제고, 투자, 장소 마케팅 '3마리 토끼' 잡는다

최근 기업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작품을 들여놓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잘 활용한 기업으로는 최근 서울 을지로에 신사옥 '페럼타워'를 지은 동국제강이 꼽힌다. 동국제강은 페럼타워 앞에 프랑스 출신 조형작가 베르나르 브네의 38m짜리 대형 철제 작품 '37.5도 아크(Arc)'를 설치해 '제철 기업' 이미지를 강화했다.

흥국생명 역시 광화문 빌딩 앞에 미국 설치 조각가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을 2002년 설치한 이후 기업 이미지 개선 효과를 봤다. 과거 노조와의 문제 등 보수적인 기업 이미지가 강했지만, 일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뜻을 담은 이 작품을 설치한 이후 기업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꿔놨다는 설명이다. 특히 설치 당시에 비용 등 포함해 10억원 안팎의 돈이 들었지만 지금 그의 5~6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세계 충청점은 아라리오가 운영하던 야우리백화점을 신세계가 제휴 아래 운영하고 있는데, 2005년 설치된 데미안 허스트의 '채러티'의 경우 구입 당시 시가 22억원짜리가 현재 100억~150억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기업의 미술품 구매는 1995년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신축할 때 건축비용의 1% 이하를 미술장식에 사용하도록 법적으로 의무화되면서 양적으로 크게 늘었다. 한국미술경영연구소 김윤섭 소장은 "기업들의 작품이 크게 늘면서 '기업에 미술품 보러 가는 시대'가 왔다"며 "기업으로선 공공미술 기능과 재화 가치 충족 등 긍정적인 효과를 동시에 충족시킨다"고 말했다.

오너들의 취향, 수집 작품에 드러난다

삼성이 리움미술관을 보유한 것을 비롯해 한진·금호·대림·OCI·아모레퍼시픽 등도 자체 미술관을 갖고 작품을 구매·관리하고 있다. 국내 미술품 수입도 크게 늘어 관세청 조사 결과 2000년대 초반 1000억원대에서 2007년 8000억원대까지 확대됐다.

미술품 수집은 오너들의 취향이 많이 반영된다. 미국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건축을 전공한 김영호 일신방직 회장은 여의도·한남동 일신 사옥을 거대 미술관으로 꾸밀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도 제프 쿤스 작품을 비롯해 작품 다수를 보유하면서 지난해 '갤러리'도 열었다. 리츠 칼튼 호텔을 운영하는 전원그룹의 이전배 회장도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 현대작가 작품 등을 포함해 200여점을 갖고 있다.

재벌가 '안주인'들이 유명 컬렉터로 활동하기도 한다. 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출신인 홍라희 리움 관장은 국내 기업 미술 트렌드를 이끌어 간다고 평가받고 있고, 이수영 OCI 회장의 부인인 김경자씨도 OCI미술관을 맡으며 고미술품에서 현대미술까지 장르를 넓히고 있다. 또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부인인 남희정씨는 상명대 공예학과 교수 출신으로 떠오르는 컬렉터로 손꼽힌다. 윤태건 더 톤 대표는 "유명 작품 구입을 통해 일반인들의 미술 취향을 높여준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면서도 "우리는 아직 해외 작품 수집에 더 열을 올리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