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값이 좋다기에 수박 심던 밭에도 몽땅 배추를 심었어요. 이제 배추가격이 폭락한다네요. 농사가 잘돼도 속맘은 온통 숯검정입니다."

16일 찾은 충남 예산군 오가면 신원리. 수십㎞에 걸쳐 이어진 비닐하우스는 수확을 앞둔 배추로 가득했다. 하지만 풍요 속에도 농심(農心)은 시들어만 갔다. 농민 한정호씨는 "배추 물량이 쏟아져 나오면 안 팔릴 게 뻔하고, 결국 밭을 갈아엎는 곳이 부지기수일 것"이라며 "쪽박 차게 생긴 농민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배추는 풍년인데 농민은 울고 있다.

예산 일대는 4~5월 전국의 봄배추 생산의 40% 정도를 점유해 왔던 대표적인 배추산지. 올해는 공급량이 더 많아 전년보다 50% 이상 훌쩍 뛸 전망이다. 그만큼 공급량이 늘어나고, 소비가 받쳐주지 않을 경우 배추값 폭락은 뻔한 일. 예산 농민 김성훈씨는 "예전엔 배추와 수박을 반반 정도로 심었는데 올해는 전부 배추를 심었다"며 "주위에서도 배추 가격이 비싸다고 다들 배추 심었다"고 말했다.

충남 예산에서 배추 농사를 짓고 있는 한정호씨는 “배추 농사가 이렇게 풍년인데도 좋아할 수도 없다”며 “5월 초 가격 폭락 소식에 눈앞이 막막하다”고 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에 따르면 올해 비닐하우스의 봄배추 재배면적은 지난해보다 30% 늘었다. 생산량은 지난해보다 46% 많은 23만t에 달할 전망이다.

농민들이 배추를 많이 심은 것은 작년 냉해 등으로 배추 공급량이 줄어 값이 폭등했던 '배추 파동'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나온 가을배추는 가락동 농수산물센터 경매시장에서 3통에 2만원 이상으로 거래됐었다. 이상 기후 등으로 작황이 좋지 않아 예년보다 3~4배 비싼 3통에 1만3000~1만4000원 선에 거래됐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정반대다. 4월 현재 배추 가격은 가락동 경매시장에서 3통에 1만550원에 거래된다. 본격적으로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이달 말 이후엔 작년의 절반 수준인 3통에 5000원대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이마트 장희성 바이어는 "전남 나주와 충남 예산 등 봄배추 주산지를 다녀보니 가격 폭락을 걱정하는 농민들이 상당했다"며 "중간상인과의 '계약 재배'로 미리 선금을 받은 일부 농민을 제외하곤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배추 때문에 감자·수박도 줄줄이 가격 올라

배추는 채소가격 동향을 미리 알려주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대아청과 오현석 과장은 "도매시장에선 배추값이 이미 폭락했다"면서 "배추와 관계된 알타리·무·쪽파 등도 모두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김치 재료로 꼽히는 건 모두 떨어진다는 얘기다.

배추값이 떨어지는 것과 반대로 올 여름철에는 수박 가격 폭등을 부를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나온다. 수박을 심었던 곳에 배추를 심는 농민들이 많았기 때문. 충남 예산의 경우 수박 생산 면적이 전년보다 50% 줄었다.

감자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는 것도 배추 때문이다. 배추산지인 전남 무안·해남 등지의 경우 3월 배추 수확이 끝나면 감자를 심어왔다. 하지만 올해는 상당수 농가가 4·5월 봄철 배추를 심었다. 감자의 평년 가격은 1㎏당 3300원대(농수산물유통공사 기준)에서 4월 초 5130원으로 치솟았다.

고랭지 양배추도 재배면적이 작년에 비해 11% 감소했고, 애호박은 6%나 줄었다. 모두 배추로 대체되면서 재배면적이 준 것이다. 가락동 농수산물센터 유병택 경매사는 "배추 하나가 채소 가격 시장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