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순 전(前) 현대자동차 부회장

“저는 럭키(lucky)한 사람입니다. 하고 싶었던 일들도 다 했고요. 언든지 떠나야 한다는 건, 월급쟁이라면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최근 사임한 현대자동차의 이현순 전 연구개발(R&D) 총괄 부회장이 25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이 부회장은 27년 동안 현대차그룹에서 일하다 이달 15일 면직됐다. 연구소 관계자들은 “아무런 예고 없는 인사였다”고 전했다.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새롭지 않은 불시 인사였다. 현대차그룹은 이 부회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사임한 뒤로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한 측근은 이 부회장이 퇴임하던 날 “길었던 인연을 여기서 접게 됐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고 말했다.

25일 저녁 인터뷰에 나선 이 부회장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건강 상의 이유로 사퇴했다’는 세간의 추측과는 달리 목소리가 또렷했고 힘이 실려 있었다. 그는 “왜들 그리 야인(野人)을 찾는거냐”며 얘기를 시작했다.

먼저 현대차에서 물러나게 된 소회를 물었다. 이 부회장은 “지금은 할 수 있는 얘기가 없다. 시간이 한 5~10년은 지나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현대차 임원들은 갑작스레 퇴임하게 되더라도 외부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갑작스러운 퇴임의 배경을 묻자 이 부회장은 “(이 같은 인사 스타일이)습관화 되어 있기 때문에 다들 그러려니 할 것”이라며 “우리의 수준이 이렇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의 퇴임 소식이 알려진 뒤 현대차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의 공헌을 감안했을 때 ‘좀 더 예우를 갖췄어야 했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다. 외신에서도 ‘현대차의 기술 치프(cheif)가 물러났다’며 이 부회장의 퇴임을 비중있게 다뤘다.

이 부회장은 1991년 현대차 최초의 독자 엔진인 1.5L(리터)급 알파 엔진의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베타 엔진을 거쳐 개발된 쎄타 엔진은 미국 크라이슬러를 비롯, 이전까지 현대차의 ‘스승’ 노릇을 하던 일본 미쓰비시에 로열티를 받고 수출되기까지 했다. 이 부회장은 이어 2L급 쎄타 엔진, 3L급 6기통 람다 엔진, 세계 10대 엔진으로 선정된 5L급 8기통 타우 엔진에 이르기까지 현대차 엔진 기술을 이끌어 왔다는 평을 받았다.

주변인들의 아쉬움을 전하자 이 부회장은 “그래도 세계의 그 어떤 자동차 엔지니어들보다도 보람은 있다”고 말했다. 또 “좋은 성과를 내고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자부심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미련은 남아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 부회장은 “미련은…”이라며 운을 뗀 후 잠시 머뭇거린 뒤 “미련은 크게 없다”며 끊어진 말을 이었다.

이 부회장은 현대차 임원의 ‘데드라인’으로 알려진 환갑을 작년에 맞았다. 현대차의 중국 총괄인 설영흥 부회장(66)처럼 화교 출신으로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인정받은 예외를 빼고 현대차 임원들은 환갑을 기점으로 회사에서 물러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올 초에는 환갑 전후인 이여성 현대로템 부회장(61)과 김원갑(59) 현대하이스코 부회장이 별 이유 없이 사임했다.

이 부회장은 “나는 이룰 것을 다 이룬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환갑 지날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또 “자동차 기술 발전에 충분히 기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별한 회한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가 없는 현대차’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물었다. 이 부회장은 “기초를 단단히 다졌기 때문에 현대·기아차는 잘 될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록 몸은 나왔지만 내가 봐서 문제라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연구원들, 부하직원들을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을 위해서, 국민 한 사람으로서 당연한 의무”라는 게 이 부회장의 생각이다.

이 부회장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해서는 “회사를 잘 이끄실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자신을 현대차로 영입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대해서는 애틋한 감정을 전했다. 공교롭게도 이 부회장의 퇴임일은 정주영 회장의 공식 10주기 추모행사가 열린 이튿날이었다. 이 부회장은 미국 제너럴모터스(GM)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정주영 회장의 ‘삼고초려’ 끝에 현대차에 입사했다.

이 부회장은 “여기까지 올 수 있게끔 자리를 만들어 준 정주영 회장님을 영원히 존경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인과의 짤막한 에피소드를 전했다.

“정 회장님은 제가 힘들 때 늘 북돋아주고 힘이 돼 주셨습니다. 일본 미쓰비시자동차가 현대차에 기술을 전수하던 시절, 미쓰비시가 정 회장님에게 ‘닥터 리가 사표를 내면 현대차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회장님은 일고의 여지도 없이 제안을 뿌리쳤습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존경할겁니다. 내가 정말 그 분이 없었으면….”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 부회장은 “어떤 방법으로 나라에, 자동차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현대차는 지난 15일 이현순 부회장의 후임으로 연구개발본부장인 양웅철 사장을 연구개발 총괄 사장으로 임명했다. 또 파워트레인센터장인 박성현 부사장을 수석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이현순 부회장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GM에서 일하다 1984년 현대차에 입사했다. 2006년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됐으며 2009년에는 세계 수준의 독자적인 자동차 엔진을 개발해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공학한림원상 대상, 교육과학기술부 ‘최고과학기술인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