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H아파트를 4억3000만원에 전세로 살고 있는 김모(40)씨는 최근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1억5000만원으로 낮추줄테니 월세를 200만원 내라는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매달 200만원을 내는 것도 걱정이지만 나중에 돌려받지도 못하는데…"라며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 2009년 이후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전세금이 급등하면서 주택 임대 시장에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세가 급속하게 사라지고 이른바 '반(半)전세'나 월세가 임대 시장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서울 용산과 강남권,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에선 전세보다 월세와 반전세 임대주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주택가의 공인중개업소 유리벽에 월세 매물을 적어 놓은 전단이 잔뜩 붙어 있다. 전세금이 오르고 전세 매물이 귀해지면서 전세를 월세로 바꿔달라는 집주인이 늘고 있다.

◆강남권 20~30%가 반전세나 월세

학계와 업계에선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주택 임대 방식인 '전세'가 서서히 사라질 것으로 보고 있다. 건국대 이현석 교수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오피스빌딩도 대부분 전세였지만 지금은 월세 시장으로 바뀐 것처럼 4~5년쯤 지나면 주택시장도 월세 위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택 임대차 시장에서는 월세로 전환되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반(半) 전세'. 반전세는 전세보증금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가운데 일부만 월세로 내는 방식이다. 주로 최근 전세금이 많이 오른 지역에서 인상된 전세금을 월세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강남에서는 최근 나오는 임대 주택 매물의 20~30%가 반전세 물건으로 바뀌고 있다. 서울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 인근의 B공인중개사무소의 경우 최근 의뢰받은 임대물건 9건 중 전세가 4건, 반전세와 월세가 각각 3건과 2건이었다.

B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여유있는 집주인은 웬만하면 매달 현금을 받을 수 있는 월세 세입자를 구해 달라고 요구한다"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의 H부동산 관계자도 "과거에는 전세와 반전세·월세의 비중이 9대1 정도였지만 최근엔 7대3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전세 보증금 줄고, 월세 비중 높아져

이미 월세가 대세로 굳어진 지역도 적지 않다. '시티파크', '파크타워' 등 시세 10억~20억원짜리 주상복합 아파트가 밀집한 서울 용산이 대표적이다. 비싼 월세(400만~500만원)에도 불구하고 파크타워(888가구) 중 3분의 1은 월세다. 주 고객은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외국인 임원이다. 다가구주택이 몰려 있는 지역도 월세와 반전세 시장이 발달해 있다. 다가구 주택은 아파트보다 월세가 낮아 목돈(전세금)을 마련하기 부담스러운 세입자가 월세를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월세 비중은 각종 통계에서도 눈에 띄게 늘어나는 모습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전체 임대시장에서 보증부월세 비중은 2009년 12월 39.5%에서 지난해 12월 41.2%로 늘어났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의는 "보증금 대비 월세의 비중이 2008년 1월 2.42%에서 2010년 12월 2.54%로 늘었다"고 말했다. 전세 보증금은 줄이고, 대신 월세를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월세 세입자 보호 대책 마련해야

집주인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저금리 상황이 지속되고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전세를 놓을 이유가 없다. 반면 월세를 놓으면 상대적으로 은행이자보다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전세보다 월세로 전환하는 게 수익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하지만 임대주택 시장이 월세 구조로 완전히 재편되면 전세 주택의 주요 소비자인 서민층이나 신혼부부의 주거비용이 상승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통상적으로 3억원짜리 아파트 전세를 100% 월세로 돌리면 세입자는 매달 210만원(월세 이자율 7% 기준)를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세입자가 3억원을 은행에 넣어두면 월 100만원의 이자(예금금리 4% 기준) 수입이 발생한다. 결국 월세로 살면 매달 110만원을 더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월세가 좀 더 낮아지면 월세 중심의 임대주택 시장으로 재편되는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예상한다. 박원갑 '부동산1번지' 연구소장은 "정부는 임대주택 시장이 월세 중심으로 재편될 것에 대비해 서민들의 주거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 작성에는 인턴기자 하선영(연세대 사회학과4학년)씨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