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연구와 김치냉장고 '딤채', 영화 '국가대표'의 공통점은?

언뜻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들은 모두 수퍼컴퓨터(Supercomputer)를 활용한 결과물이다. 정보기술(IT) 발전의 산물인 수퍼컴퓨터가 과학·산업계는 물론 문화계의 지형도를 바꾸고 있다. 수퍼컴퓨터는 일반 가정용 컴퓨터로는 100년 걸릴 작업을 하루 만에 해내는 꿈의 장비. 산업계에서는 제품 개발 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활용이 늘고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무기개발 등 군사적 목적으로도 수퍼컴퓨터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 발표된 전 세계 수퍼컴퓨터 순위에서 중국의 '톈허(天河)-1A'는 이 분야 부동의 1위였던 미국을 제치고 최고 자리에 등극해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지수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수퍼컴퓨팅본부장은 "수퍼컴퓨터는 이제 특수 분야에 쓰이는 장비가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 활용되는 기반 시설로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1위 수퍼컴퓨터

얼마나 성능이 좋아야 수퍼컴퓨터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반도체 기술의 발전 덕분에 해마다 두 배 이상 빠른 수퍼컴퓨터가 출시되고 있어서 수퍼컴퓨터의 기준도 해마다 상향조정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보통 정보의 처리 속도를 기준으로 세계 500대 컴퓨터 정도를 선정하며 수퍼컴퓨터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첫 수퍼컴퓨터는 1971년 미국에서 개발한 크래이(Cray)-1이었다. 이 컴퓨터의 속도는 160메가플롭스(MFLOPS·초당 100만번의 계산을 하는 능력) 수준이었다. 이번에 세계 1위를 차지한 중국의 톈허-1A는 2.57페타플롭스(PFLOPS·초당 1000조번 계산)의 속도로 1위를 차지했다. 크래이-1의 1000만배가 넘는 1초당 2570조번의 계산을 할 수 있는 것. 보통 컴퓨터 17만대가 해야 하는 일을 혼자 한다는 의미다. 세계 2위인 미국의 재규어는 1.76페타플롭스의 성능을 갖고 있다. 한국도 3대의 수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다. 속도가 0.32페타플롭스인 기상청의 '해온'과 '해담'이 각각 19위와 20위를 차지했고, 지난 17일 본격 가동을 시작한 KISTI의 '타키온2'는 0.27페타플롭스로 24위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16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수퍼컴퓨팅 콘퍼런스에서 학생들이 수퍼컴퓨터 시스템을 구경하고 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발표된 세계 500대 수퍼컴퓨터 명단에서 중국의 톈허-1A는 미국 재규어를 제치고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수천개의 컴퓨터를 이어붙여 만든다

초기 수퍼컴퓨터는 하나의 큰 컴퓨터 안에 여러 개의 중앙처리장치(CPU)와 기억장치 등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긴 개발 기간과 많은 비용을 수반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요즘은 여러 대의 컴퓨터를 고속 네트워크로 연결해 이어붙이는 '병렬형(클러스터형)' 방식으로 수퍼컴퓨터를 구축한다. 이 방식은 짧은 시간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수퍼컴퓨터를 구축할 수 있다. 다만 한 개의 컴퓨터만 문제를 일으켜도 시스템 전체가 마비된다는 단점도 있다.

한국이 보유한 타키온2의 경우 3004개의 서버(기업용 컴퓨터)를 이어붙였다. 하나의 서버에는 가정용 컴퓨터에 흔히 들어 있는 펜티엄급 CPU가 두 개씩 들어 있다. 3004개의 서버들은 케이블로 연결됐으며 여기에는 정보의 흐름을 제어하는 스위치도 붙어 있다. 타키온2 저장장치의 용량은 1200테라바이트(TByte·1TByte=1024GByte) 정도다.

이식 KISTI 박사는 "3004개의 서버가 일을 나눠서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효율적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도록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같은 수퍼컴퓨터를 이용해도 운용자에 따라 이용 효율은 1000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덧붙였다.

◆과학 연구에서 영화까지

보잉사는 비행기를 설계하는 데 부품의 내구성 등을 수퍼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검증한다. 이전에는 비행기 1대를 개발하기 위해 약 70대를 만들어봐야 했지만 최근에는 10대 정도만 만들고 개발을 마칠 수 있다. 자동차 메이커 포르셰는 독일 슈투트가르트대학 수퍼컴퓨터 구축 비용 절반을 대고 이를 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88년 첫 수퍼컴퓨터를 도입한 이래 꾸준히 활용을 늘려왔다.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는 지난 2005년 수퍼컴퓨터를 80일간 사용하며 당시로써는 세계 최대 규모의 우리 우주의 진화모델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PC를 사용했다면 6만년이 걸릴 연구였다. 임지순 서울대 교수는 최근 수퍼컴퓨터를 이용해 수소저장물질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지금은 각 가정에 보급된 김치냉장고도 수퍼컴퓨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김치맛을 잘 내기 위해서는 냉장고의 크기와 온도, 김치의 양, 숙성 기간 등에 따라 수많은 실험을 해야 하는데 수퍼컴퓨터가 이를 대신했다.

최근에는 영화 산업에서도 수퍼컴퓨터의 활용이 늘어나고 있다. 미세한 표정까지 표현해내는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수천~수만 명의 군사들의 움직임을 표현해야 하는 영화까지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대목에서는 어김없이 수퍼컴퓨터가 등장한다. 이지수 본부장은 "미래에는 신산업 분야에서 수퍼컴퓨터 활용이 늘어날 것"이라면서 "특히 핵융합 같은 거대과학 분야에서도 수퍼컴퓨터의 기여도는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