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재정 위기 확산에 대한 우려로 뒤흔들렸던 세계 금융 시장의 지형이 바뀌고 있다.

지난 5~6월에 최고조에 달했던 유럽의 재정 위기는 유럽금융안정기금 조성과 유럽 은행권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재무 건전성 평가) 시행 후 일단락됐다.

이제 전 세계 금융 시장의 관심은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이 제기된 미국으로 쏠리고 있다.

'유럽의 단일 통화로서 실격'이라는 예측까지 낳으며 미래가 불투명했던 유로화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지만 미국 달러는 안전자산이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로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지난 20일(현지시각) 벨기에 브뤼셀의 EU(유럽연합) 본부 앞에서 한 여성이 그리스 긴축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 사태는 정부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노동계 총파업이 이어지면서 금융시장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달러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달러보다 더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일본 엔화는 강세 기조를 이어가고 있다. 엔고에 따른 수출 기업의 피해를 막기 위한 일본 정부의 외환 시장 개입설까지 흘러나올 정도다.

◆ 유로화 가치는 반등 추세

그리스의 재정 적자 문제로 촉발된 남유럽 재정 위기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전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을 때만 해도 유로화의 가치는 바닥을 모른 채 추락했다. 상품투자 전문가인 짐 로저스 ‘로저스 홀딩스’ 회장은 “앞으로 15~20년 후 유로화는 쪼개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로존의 붕괴를 막기 위해 회원국들은 4400억유로(약 650조원) 규모의 금융안정기금이라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은행권의 부실에 대한 전 세계 투자자들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스트레스 테스트를 실시,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성과를 거뒀다.

덕분에 7월 말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는 11주 만에 최고치를 달성하면서 1.30달러를 넘었다. 지난 6월 초 4년 만에 최저 수준인 1.19달러로 추락했던 유로화 가치는 현재 약 11% 올랐다.

일각에서는 유로화가 1.35달러선까지 회복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유로화 가치가 다시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유로화 약세에 따른 수출 경쟁력 향상으로 덕을 봤던 유로존의 경제는 유로화 가치가 다시 상승할 경우 성장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바클레이스는 유로화 가치가 1.27달러까지 밀릴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 힘 잃은 달러, 디플레이션 우려와 맞물려

유로화는 단기적으로 활기를 되찾았지만 달러는 잔뜩 움츠러드는 양상이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측정하는 달러 인덱스는 6월 중순 이후 하락을 지속, 지지선인 80 근처에서 움직이고 있다. 4일(현지시각) 달러 인덱스는 80.933을 기록, 전날 3개월 만에 최저치에서 0.4% 상승했다.

지난 2년간 달러 인덱스가 20%가량 오르는 등 대표적 안전자산으로서의 위세를 과시했던 달러가 약세로 돌아선 이유로는 미국 경제 지표 악화를 꼽을 수 있다.

미국의 실업률은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6월에 9.5%였던 실업률은 7월에는 9.6%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실직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미국 경제의 70%를 차지하는 소비 시장도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민간경제연구기관인 콘퍼런스보드가 발표한 7월 소비자신뢰지수는 50.4를 기록, 5개월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고용 시장의 회복세가 주춤한 가운데 일자리에 대한 우려가 커져 미국 국민의 소비 심리가 악화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발표된 미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은 연 2.4%의 증가율을 기록했지만 지난해 4분기(연 5%)와 올 1분기(연 3.7%)에 비해서는 증가율이 둔화됐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아예 6월 FOMC 회의에서 미국의 올해 GDP 증가율 전망치를 3.2~3.7%에서 3~3.5%로 하향 조정했다.

이처럼 미국의 경제 회복이 흔들리고 있다는 징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되면서 디플레이션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제임스 블러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달 29일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블러드 총재는 "미국 경제가 현재 일본 스타일의 디플레이션과 유사해지고 있다"고 지적하며 연준이 국채 매입을 통해 양적 완화 정책을 확대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투자자들은 위험자산인 주식 시장에서 빠져나와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채권, 특히 미국 국채 시장으로 투자금을 옮겨야 할지 눈치를 보고 있다.

세계 최대 채권 펀드인 핌코는 이미 디플레이션 발생 가능성을 일찌감치 염두에 두고 투자 자산에서 채권의 비중을 늘리고 있다. 모하메드 엘 에리언 핌코 최고경영자는 5일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져들 가능성은 25%”라고 진단했다. 최근 핌코의 간판 펀드인 토탈리턴 펀드에서 미국 국채 비중은 51%로, 지난 3월 말의 33%에서 상당히 증가했다. 이 같은 비율은 6년 만에 최대다.

◆ "네가 제일 낫다" 엔화 강세에 일본 정부는 '죽을 맛'

미국 경제 회복세가 삐걱거리자 투자자들은 엔화로 몰려들고 있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지난 4일 장중 85.3엔까지 올라 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근 3개월 동안 엔화는 달러 대비 11% 절상됐다. 지난해 8월 엔화가 달러 대비 95엔~96엔에서 거래됐음을 감안하면 최근 엔화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국가채무 비율이 GDP 대비 200%에 달하는 등 미국과 마찬가지로 만성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이 엔화 매수를 고집하는 이유는 미국과 달리 일본은 무역수지 흑자국으로서 국제수지가 건전하기 때문이다. 일본 국채의 95%를 일본인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 역시 엔화의 안전을 보증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안고 있는 빚이 남의 나라 돈이 아니라 자국민이 빌려준 것이라는 점에서 외부 불안 요인이 미미한 것이다.

엔고는 일본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에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이 “엔화 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구두개입에 나섰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맥쿼리 리서치의 리처드 제람 아시아 부문 대표는 지난달 2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엔화 가치가 달러 대비 80엔~85엔으로 오르면 일본 금융 당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제람 대표 역시 시장 개입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엔화의 실질실효환율이 장기 평균보다 아주 약간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엔화의 현재 가치는 중기적 펀더멘털에 부합한다”며 “실효환율은 지난 3월 기준으로 중단기 평형 상태에 가까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