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한 유통팀장

한때 국산 잡화 브랜드의 대표주자 격이었던 '쌈지(Ssamzie)'가 7일 최종 부도처리됐다. 최근 몇 년 동안 경영난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쌈지의 부도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비통·구치 같은 외국 명품 브랜드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그나마 '들으면 알 정도로' 이름을 알린 토종 브랜드가 또 하나 몰락한 데 대해 국내 패션업계의 표정은 어둡다.

브랜드 집중 않고 한눈팔다 몰락

쌈지의 부도 과정을 보면 토종 브랜드가 왜 장수 브랜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지 못하고 몰락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천호균 전 대표가 1993년 설립한 쌈지는 정형화된 핸드백 시장에 아이디어 번뜩이는 캐주얼풍의 백을 선보이며 선풍을 일으켰다. '쌈지' 이외에, '놈', '딸기', '아이삭', '진리' 등 한국적 정서가 담긴 독특한 브랜드와 참신한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면서 창업 5년 만인 1998년 544억원 매출에 20억원의 순이익을 올릴 정도로 성장했다. 2001년엔 코스닥에 등록, 기업을 공개했다.

그러나 코스닥 등록 후 2년간 흑자를 냈을 뿐 2003년부터 지금까지 내리 7년간 적자를 냈다. 지난해에는 578억원 매출에 129억원의 적자를 냈고, 감사의견조차 거부당했다. 쌈지의 전직 간부는 "코스닥 등록을 통해 모은 자금이 회사를 망하게 하는 데 쓰이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익이 되지 않는 사업에 지나치게 몰두한 게 몰락의 이유라는 것.

쌈지가 2005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조성한 복합문화공간 쌈지길. 새로운 문화적 시도로 각광 받았지만 연이은 적자로 쌈지의 경영에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창업자인 쌈지 천호균 전 대표는 2000년대 초 쌈지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이탈리아에 '구치(GUCCI)'가 있다면 한국에는 '쌈지'가 있다", "저는 쌈지라는 시를 쓰는 시인 천호균입니다"라고 자신과 자신의 브랜드를 소개할 정도로 자신에 넘쳐 있었다.

천 대표는 프랑스의 실험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를 인수하고, 엔터테인먼트 예술 영화 부동산 테마파크로 사업을 계속 확장했다. 반면 사업의 본체인 '쌈지' 브랜드의 파워는 갈수록 떨어졌다.

천 대표는 코스닥 등록 이후 모인 자금으로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 '마틴싯봉'을 인수했다. 프랑스 소재 디자인 스튜디오에 총 20억원을 투자해 지분 66%를 확보했지만 자유분방한 디자이너 마틴 싯봉과 파리 현지회사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 패션업계 관계자는 "쌈지가 이 브랜드를 사고 관리하는 데 100억원 가까이 들였지만 번 돈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동산과 결합된 테마파크 사업에 눈을 돌린 것도 몰락을 재촉했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딸기가 좋아'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테마파크였다. 그러나 입장료 말고는 이렇다 할 수익 모델이 없었다. 그런데도 딸기카페·쌈지갤러리 등에 연이어 투자했다. 서울 인사동에 오픈한 패션몰 '쌈지길' 역시 5년 내내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게다가 2007년에는 영화 사업에까지 진출했다. 천 대표는 당시 "패션과 영화의 새로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첫 번째 영화 '무방비 도시'는 실패했고, 두 번째 영화인 '인사동 스캔들'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쌈지 경쟁력의 핵심인 디자인실의 핵심 인력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쌈지에서 일했던 한 디자이너는 "사장님의 예술에 대한 열정은 이해하지만 핵심 디자이너가 흔들리는 바람에 디자인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번 유행은 쉬워도 꾸준한 인기는 어렵다

종합 패션 브랜드 중에서도 최근 1~2년 새 부도난 토종 브랜드들은 의외로 많다. '펠레보르사'라는 핸드백 브랜드는 1996년 런칭한 후 백화점에 입점한 토종 브랜드로 10여년간 명맥을 이어 왔지만 작년 8월 브랜드를 접었다. 여성 패션 브랜드인 마리끌레르·이지엔느, 이원재, 남성복 브랜드 트래드클럽 등 토종 브랜드들은 모두 2008년 무대 뒤로 사라졌다. 이들은 모기업이 다른 사업에 눈을 돌리다가 유동성 위기를 겪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토종 브랜드들은 디자인 같은 브랜드의 핵심 역량보다는 무리한 사업 확장이나 모 회사의 경영난으로 스러져 가는 경우가 많다. 패션업계에서는 "한번 유행은 쉽지만 꾸준한 인기는 어려운데 그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끈기와 장인정신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롯데백화점 핸드백 담당 김동일 과장은 "명품 핸드백이 명품이 되기까지에는 고객들이 당장 인식할 수 있는 그 브랜드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면서, "국내 핸드백 브랜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디자인, 소재 개발 등 브랜드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하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8일부터 정리매매에 들어간 쌈지의 주가는 94% 폭락한 10원에 거래됐다. 그러나 쌈지의 인기캐릭터였던 '딸기' 캐릭터와 관련한 사업부문은 그대로 유지된다. 작년 10월 말 ㈜어린농부가 캐릭터 사업을 양도받았기 때문이다. 회사는 무너지지만 유행했던 창의적 혼이 담긴 쌈지의 디자인과 딸기 캐릭터는 사라지지 않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