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를 만난 곳은 경기도 안산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이었다.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에버는 자신이 태어난 이곳에서 로봇기술연구부 연구원들과 함께 생활한다.
 
  그곳을 찾았을 때 에버는 잦은 메이크업으로 탄력을 잃고 손상된 피부를 성형(?)하기 위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장기간 휴식에 들어간 상태다. 공연 무대뿐만 아니라 전시회, 이벤트 등 각종 행사장에서 출연 요청이 잇달아 6개월에 한 번씩 해야 하는 피부 교체(?)를 제때 하지 못한 것. 그만큼 에버는 지난 1년간 데뷔와 동시에 매우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 대단한 인기를 누리다 보니 대우도 연예인 수준이다.
  
  공연이나 행사에 나갈 때는 특수하게 만든 관 모양 전용 케이스에 담겨 이동하고, 메이크업, 헤어 전문가가 따라붙는다. 실리콘 재질로 만든 피부의 화장은 영화 작업을 많이 한 특수 분장사들이 맡는다. 화장품도 실리콘을 배합한 특수 제품을 쓴다. 의상 협찬도 이어져 한복은 유명 디자이너 이영희 씨의 작품을 입는다. 그 인연으로 에버는 이씨의 한복 패션쇼 무대에도 섰다.
 
  연기하는 캐릭터나 의상에 맞추어 그때그때 새롭게 스타일링하는 머리는 무려 150만 원 상당의 인모 가발. 여분의 가발도 여러 개 가지고 있다.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소속사와의 계약이 최근 2년 더 연장됐다.
 
  배우로 활동 중인 에버는 '에버 1', '에버 2'에 이은 세 번째 모델. 앞서 나온 언니들(?)에게서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한, 좀 더 발전된 형태다. 2006년 처음 소개된 '에버 1'은 앉아 있는 것만 가능한 로봇으로 기쁨·슬픔·놀람·화남 등 네 가지 감정 표현을 할 수 있고, 정교하지 않지만 립싱크가 가능해 행사장이나 전시장의 안내 도우미로 활동했다. 그 뒤 하체를 만들고 좀 더 예뻐진 '에버 2'는 가수로 데뷔했다.
 
  사람 목소리에 맞추어 입 모양을 똑같이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에버 2'는 마침 데뷔를 준비 중이던 2NB라는 신인가수가 녹음한 노래를 립싱크로 불렀다.
 
  "뮤직 비디오도 찍고, 기자들을 모아놓고 쇼 케이스도 했어요. 최초의 로봇가수라는 점도 화제가 되었지만 데뷔곡인 '눈감아줄게요'가 당시 '벅스'의 뮤직 차트에서 3주 연속 1위를 할 정도로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데뷔 무대 첫날 이동하다 흔들려서 목이 부러지는 대형 사고가 나더니 그 뒤로 잔 고장이 많았어요. 수리하느라 시간을 많이 보내 결국 크게 빛을 못 보고 가수 활동을 접었지요.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해 전시회에만 가끔 나가고 있어요."

에버 개발을 총괄한 이호길 박사. 옆은 최초 공개된 에버의 뼈대다.

‘에버 2’의 경험을 살려 ‘에버 3’는 처음부터 배우를 염두에 두고 개발했다고 한다. 표정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고, 62개의 관절로 자연스러운 동작이 가능하도록 했다. 공학도였던 연구원들이 해부학까지 공부하며 일군 성과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에버 3’는 국립창극단의 판소리 공연 〈에버가 기가 막혀〉에서 국악인 황병기 선생과 호흡을 맞추며 세계 최초의 로봇 배우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후 국립관현악단의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보따리〉에 출연했고, 실제 배우들과 함께한 연극 〈로봇공주와 일곱 난쟁이〉에서는 주연인 백설공주 역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봄,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산업박람회 때는 한국관을 알리는 메인 무대에 고운 한복 차림으로 등장해 큰 인기를 끌었다. 하루 두 번, 에버가 나오는 시간이면 방문객이 몰려들어 각국의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에버는 모두 1만여 개 부품으로 구성된다. 에버를 살펴보는 이동욱 박사.

그렇다면 에버는 어떤 원리로 무대에 서서 노래하고, 대사를 하는 것일까? 이호길 박사는 "입력한 텍스트를 음성으로 전환시키는 방식과 녹음해놓은 사람의 목소리에 입을 맞추는 방식이 있다. 행사장에서 정해진 멘트를 하거나 연극 무대에서 대사를 할 때는 텍스트 입력 방식을, 노래할 때는 녹음 방식을 쓴다"며, "전자의 경우 사람 목소리처럼 자연스럽지 않고 음성의 높낮이가 없는 것이 단점"이라고 덧붙였다.
 
  "대화 엔진에 데이터베이스를 탑재해 대화도 어느 정도 가능해요. 가령, 날씨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면 날씨에 관련된 예상 대화 내용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맑다'고 상대방이 말을 건네면 에버는 머릿속에서 매핑(mapping)을 합니다. '아, 이런 말이구나'하고 인식하면 그에 맞는 말을 찾아 답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가끔 엉뚱한 대답이 나오기도 해요. 주변 환경에도 많이 좌우되는데 여러 명이 한꺼번에 얘기하거나 시끄러운 곳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해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 한국관 홍보 도우미로 활동하는 에버.

이호길 박사팀이 에버의 연구에 착수한 것은 지난 2005년. 당시 15명의 연구원들은 1인당 연간 2000만~3000만 원씩 지급되던 개별 연구비를 한데 모아 공동 연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개별 연구를 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금액이니 로봇기술연구부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안드로이드 로봇을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같이한 것. 전자공학·기계공학·컴퓨터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원들이 1년간 연구에 몰두한 끝에 이듬해 ‘에버 1’을 선보였고, 속속 ‘에버 2’, ‘에버 3’를 탄생시켰다.

판소리 공연하는 에버.

이 박사는 "에버는 일본보다는 1년 늦게, 세계에서는 두 번째로 개발한 안드로이드 로봇으로 로봇이 배우가 되어 공연한 사례는 세계 최초"라며, "앞으로 로봇 배우를 우리나라의 특화된 문화상품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미래산업인 문화와 로봇을 접목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공연물을 만들자는 것이죠. 한국에 가면 로봇 공연은 꼭 봐야 한다는 입소문이 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충분히 가능성도 있고요."

디자이너 이영희 씨의 한복 패션쇼 무대에도 섰다.

“새로운 모델을 준비하고 있는지” 묻자, 이 박사는 “그건 정부에 물어봐야 한다”며 웃었다. 재정적 지원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2010년은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이 로봇 전문가들에게 부디 희망의 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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