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가와 게이타로

3일 도쿄 자택에서 만난 원로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長谷川慶太郞·83)씨는 "여기서 이 회장과 인연이 시작됐다"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가 1978년 펴낸 '한국의 경제'란 책이다.

"일본에서 '한강의 기적'은 더 이상 없다는 비판만 있을 때였어요. 난 이 책에서 '한강의 기적은 계속된다. 한국은 반드시 선진공업국 멤버에 들어갈 것'이라고 썼지요. 책을 읽은 이 회장이 출판사에서 연락처를 알고 직접 전화를 했어요. 만나자고. 그 후로 일본에 오시면 저를 불렀습니다. 책은 삼성 간부 연수에서 교재로 사용됐지요."

하세가와씨는 이병철(李秉喆) 삼성 회장이 생전 도쿄에 머물 때 늘 직접 만나 한·일 경제에 대해 토론하던 일본의 유명 평론가다. 신문기자를 거쳐 1963년 평론가로 독립한 뒤 일본·아시아·세계 경제를 망라하는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1976년 12월 7일 삼성본관 3층에 설치된 삼성그룹 종합전산실 가동식에서 이병철 회장(가운데)과 이건희 당시 이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당시 한국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일본과 차이도 많았고.

"만나면 말씀하셨어요.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라고.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고,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하셨지요."

―정말로 '따라잡겠다'고 말씀하셨나요?

"여러 번 들었습니다. '하세가와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요.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지요. 일본의 힘이 아주 강할 때 그는 도전했고, 결국 세계 1위를 만든 것입니다."

―한국은 아무것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것이지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성공 모델을 만든 것입니다. 이노베이터(innovator· 혁신가)였지요.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한국이 키울 수 있는 것은 인재(人材) 뿐이라고. 그래서 먼저 일본에 요청한 것이 인재였지요. 탁월한 판단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인간관계가 넓었나요?

"넓다기보다 깊었습니다. 항상 3명이 함께 식사를 했는데 1명은 NTT(일본 최대 전화회사) 초대사장을 지낸 신토 히사시(眞藤恒·2003년 작고)씨였습니다. 이시카와지마하리마(石川島播磨)중공업(현 IHI) 사장을 지낼 때부터 친했지요. 신토씨도 전면 협력했습니다."

―한국의 발전에, 삼성의 발전에 일본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도움만으로 세계 1등을 만들 수 없습니다. 물론 삼성반도체도 인력, 장비, 부품, 원료를 모두 일본에 의존해 시작했습니다. 도시바, 히타치에서 많은 인재들을 데려갔지요. 요코하마(橫濱)에 연구소를 만들어 일본의 인재 1500명을 한데 모았습니다. 인재에 대한 대단한 정열이었지요. 하지만 이 회장은 수많은 삼성 인재들을 거꾸로 일본 대학에 보냈습니다. '빌리는 것만으론 안 된다. 우리가 소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노선에 이건희 회장이 더 많은 돈을 투자해 지금의 삼성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회장은 일본에 오시면 주로 무엇을 하셨나요?

"먼저 책방에 갔습니다. 당시 삼성 도쿄지사가 있던 가쓰미가세키 빌딩 책방에 주로 가셨습니다. 엄청난 독서가였지요. 경제, 기술, 역사, 추리소설까지 샀습니다. 그리고 아키하바라(秋葉原) 전자상가를 다니면서 신제품을 사모았어요. 그걸 보면서 '제품은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고장이 없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 기준까지 올라가려면 삼성은 아직 멀었다'고 말씀하셨지요. 책과 전자제품 이외에 이 회장이 직접 무엇을 사는 걸 본 일이 없습니다."

―이 회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최대의 프로모터(promoter· 기획자)였습니다. 모직·제당·전기·반도체·액정·중공업…. 전 분야에 걸쳐 기술혁신을 만들어낸 최대의 공로자이지요."

―일본 경영자를 비교하면?

"전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혼다자동차 창업자)를 들고 싶습니다. 공격적으로 파고든 강한 집념이 서로 닮았지요."

―무엇에 파고든 것입니까?

"꿈에. 일류기업이 되겠다는 꿈이었지요. 수십 년 동안 꿈을 잃지 않고 꿈을 계속 추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불처럼 열정적인 정주영, 간결하고 냉철한 이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