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있는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연구실. 한 연구원이 TV 모니터에 나온 원더걸스의 '노바디' 뮤직 비디오를 노트북에 옮겨 달라는 동료 연구원의 부탁을 받았다. 연구원이 TV 모니터와 노트북을 양손으로 붙잡자 노트북에서는 화려한 노바디 뮤직 비디오가 흘러나왔다.

이른바 인체 통신기술이다. 사람이 디지털 장치의 부속품이 되어 디지털 신호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처럼 사람이 IT의 일부가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인체를 디지털기기의 연결 케이블로

고등학교 동창들이 등산 가서 오랜만에 사진을 찍었다. 지금까지는 사진을 전달하려면 이메일 주소를 모아야 한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카메라와 친구들의 휴대폰을 양손으로 잡기만 해도 사진이 전달된다. 인체 통신기술 덕분이다. 인체 통신은 사람 몸에 전기가 흐를 수 있다는 원리에서 출발했다. 데이터가 전기 신호로 전환돼 사람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다. 인체 통신이 상용화되면 컴퓨터와 프린터 단자를 이어주는 케이블이 필요 없다. 컴퓨터와 프린터를 손으로 이어주기만 하면 된다. 인체 통신은 신체를 케이블로 변신시킨다.

인체 통신기술이 상용화되면 버스 정류장에서 목적지에 적합한 버스 노선을 휴대폰에 다운로드 받아 확인할 수 있다. 벽 하나를 가득 메운 버스 노선표를 눈 빠져라 쳐다볼 일이 없어진다. 영화 매표소 풍경도 달라진다. 보고 싶은 영화의 샘플을 인체 통신으로 휴대폰이나 PMP 등 휴대용 디지털기기에 내려받아 감상할 수 있다. 영화를 결정하면 자신의 금융 정보를 담은 전자제품과 매표소를 두 손으로 연결해 결제한다.

ETRI 연구원이 노트북에서 노트북으로 자신의 몸을 사용해 뮤직 비디오를 전송하고 있다. 연구원이 양손으로 노트북에 부착된 단말기와 단말기를 연결하면 인체로 통신이 가능한 인체 통신이 이뤄진다.

인체가 디지털기기를 이어주는 케이블로 진화하는 것이다. ETRI는 2012년에 72조원대의 세계 인체 통신기술시장이 열릴 것으로 전망한다. 이후 시장은 폭발적으로 팽창해 2015년에는 200조원대로 늘어난다.

ETRI 인체통신 SoC개발팀 강성원 팀장은 "기술적인 어려움은 모두 극복했다"며 "다만 전자기기업체 간의 표준화 작업이 선행돼야 인체 통신기술을 길거리에서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치의와 집사 역할을 수행하는 디지털 지니

ETRI에서는 디지털 지니(Genie)도 연구 중이다. 지니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요정 이름이다. 디지털 지니는 사람의 위치 정보와 체온, 맥박수 같은 신체 정보를 유·무선의 초고속 통신망을 활용해 취합하고 이를 필요한 기관에 전달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디지털 지니만 있으면 환자 보호와 진단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바뀐다. 환자의 맥박수·체온 등의 의료 정보를 의사가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다. 신체 정보를 중앙 컴퓨터에서 모니터링하면서 위험 신호가 발생하면 의료진에 알려준다. 퇴원 후에도 혈당지수·맥박 등의 수치도 모두 실시간으로 병원으로 전송된다. 필요한 경우에만 통원 치료하고 나머지는 지금보다 더 안전하게 환자의 증세를 감시하는 데에도 디지털 지니가 사용된다.

디지털 지니는 보이지 않는 집사(執事) 역할도 한다. 예컨대 퇴근을 해서 집에 들어가면 디지털 지니는 가정용 로봇을 현관에 대기시킨다. 계절에 맞는 냉·난방 온도를 집에 맞춰 놓고 조명까지 미리 켜놓는 것은 기본. 로봇으로부터 "주인님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어요"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방으로 이동해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오면 디지털 지니는 TV를 켜고 사용자가 즐겨 보는 채널을 보여 준다. 수백 개의 IPTV 채널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 이를 선별해주는 능력도 디지털 지니에는 중요한 기능이다. ETRI 네트워크로봇 연구팀의 김현 박사는 "유비쿼터스·홈 네트워크 등을 모두 집대성한 기술이 디지털 지니"라며 "초고속 유·무선 통신이 얼마나 융합되는지가 디지털 지니 구현의 선결 과제다"고 말했다.

◆마케팅 혁명 가져오는 PLL

디지털 지니의 보완재적 성격의 기술이 퍼스널라이프로그(personal life log·PLL)이다. PLL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는 기술이다. 일종의 디지털 일기인 셈이다. 일기가 하루를 회상하면서 사람이 의도적으로 기록한다면 PLL은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하루 동안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를 모두 기록(log)한다. 목걸이 같은 장신구에 초소형 카메라, 녹음기를 부착하고 GPS에 기반을 둔 위치 정보를 조합하면 PLL이 구현된다. 이렇게 온종일 있었던 일을 기록하면 디지털 지니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데 사용된다. 예컨대 요일에 따라 퇴근시간이 어느 정도로 달라지는지를 예측할 수 있다. 보험사원 같은 영업사원은 종일 만났던 고객의 정보를 일일이 손으로 적을 필요가 없다.

치매 노인의 기억력 제고에도 PLL이 활용된다.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고령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ETRI, KAIST는 경희대의료원과 함께 치매 치료에 PLL을 접목시켰다. 노인들의 PLL을 의료진이 같이 보면서 질문을 통해 기억력을 높이는 것이다. 의료진이 "할머니 오늘 점심으로 식당에서 뭘 주문하셨는지 기억나세요"하면 할머니는 당시 장면을 회상하면서 기억력이 좋아진다.

PLL은 마케팅의 혁신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나이키는 2006년부터 아이팟나노와 결합한 운동화를 판매하고 있다. 사용자의 운동량을 측정해 보다 운동효과가 높은 운동화 디자인에 활용한다. PLL이 되면 사람이 목적지마다 어떤 속도로 얼마나 걷는지 혹은 얼마 간격으로 쉬는지를 별도의 장치 없이 분석이 가능해진다.

PLL을 활용한 시장이 2012년에는 127억달러(약 15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ETRI 배창석 박사는 "PLL은 많은 영상 정보를 취합하기 때문에 기존 문자 위주의 검색 기술로는 한계가 있다"며 "검색 기술의 발전 여부에 따라 PLL시장의 창출 시기가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