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로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다. 하지만 영하 30도 아래의 극지방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생물들이 있다. 몸에서 분비되는 천연 부동액(不凍液)인 결빙(結氷)방지 단백질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극지 생물의 이런 천연 부동액을 세포치료용 줄기세포나 탯줄혈액의 냉동보관에 이용하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혹한에서도 살아남는 자연의 지혜로 또 다른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줄기세포 살릴 극지 미생물

순수한 물은 온도계가 섭씨 영하 39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얼지 않는다. 얼음이 어는 것은 물에 먼지 같은 불순물이 있기 때문이다. 먼지 주변으로 물 분자가 달라붙어 얼음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불순물이 얼음 결정의 핵(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한국해양연구소 부설 극지연구소의 김학준 박사는 최근 겨울에 바다가 얼어도 살아남는 북극의 효모와 남극의 녹조류를 찾아냈다. 효모나 녹조류는 얼음 핵에 결빙방지 단백질을 분비해 물 분자가 달라붙지 못하게 한다. 덕분에 어는 점이 몇 도씩 내려가 얼음 사이에 얼지 않는 바닷물의 안식처를 만들 수 있다. 김 박사팀은 내년부터 이 결빙방지 단백질을 혈액이나 줄기세포, 탯줄혈액의 냉동보관에 이용하는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일반적으로 세포를 냉동보관하려면 영하 196도까지 온도를 낮춘다. 이때 세포가 얼지 않도록 글리세롤과 같은 화학 결빙방지물질을 넣는다. 극지 생물이 분비하는 결빙방지 단백질은 화학물질과 달리 독성이 없어 세포 냉동보관에 적합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더 큰 효능은 얼렸던 세포를 다시 녹일 때다. 온도를 높이다가 영하 130도가 넘어가면 세포 내부에 남아 있던 수분이 다시 얼음 결정이 된다. 얼음은 세포에 손상을 주거나 심한 경우 세포를 터뜨린다. 냉동보관한 줄기세포의 회수율이 10%대에 머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학준 박사는 "줄기세포 연구에 엄청난 투자가 이뤄지고 있지만 해동(解凍) 과정에서 손상을 막는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극지 생물의 결빙방지 단백질을 이용하면 귀중한 생물자원의 동결보존에 크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난 얼지 않아!”극지에서 살아가는 생물에선 천연 부동액인 결빙 방지 단백질이 나온다. 이를 줄기세포 냉동보관이나 겨울에 잘 자라는 작물 개발에 이용하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왼쪽부터 알래스카 딱정벌레, 남극 미세조류(녹조류), 남극개미자리.

아이스크림에서 감자에까지 이용 가능

천연 부동액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 있다. 미국, 캐나다 등에서는 이미 1970년대에 남극 물고기의 피에서 결빙방지 단백질을 찾아냈다. 냉동실에 보관해도 아이스크림이 부드러운 것도 이러한 천연 부동액을 첨가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한 식품회사는 역시 물고기에서 추출한 결빙방지 단백질을 젤리에 넣어 냉동보관해도 말랑말랑한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문제는 가격이다. 극미량으로도 효과가 있다지만 물고기 수가 한정돼 있다 보니 단백질의 가격이 1g당 1000만원대다. 최근 결빙방지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전자를 미생물에 넣으면 손쉽게 단백질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학준 박사팀은 올해 극지 효모와 녹조류에서 결빙방지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찾아내 게놈분석까지 마쳤다. 극지연구소는 2004년에도 남극의 미세조류인 돌말에서 결빙방지 단백질을 찾아낸 바 있다. 하지만 당시 국제공동연구로 진행돼 특허권 문제로 상용화 연구는 중단된 상태다.

유전자는 바로 작물에 집어넣을 수도 있다. 농촌진흥청 고령지농업연구소 서효원 박사는 극지연구소의 위탁을 받아 2006년 남극 잔디와 남극개미자리라는 식물에서 '저온 저항성' 유전자를 찾아냈다. 이것을 감자에 집어넣으면 영하의 기온에서도 잘 자라는 품종을 만들 수 있다. 현재 경북대 윤호성 교수팀이 이 유전자의 기능을 분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극지에서 사는 대구의 천연부동액 유전자를 연어에 집어넣어 겨울에도 계속 자라게 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딱정벌레에서 찾은 새로운 부동액

가격을 낮추는 또 다른 방법은 단백질보다 훨씬 크기가 작은 천연부동액을 찾는 것이다. 지난달 말 미국 노트르담 대학 켄트 월터스(Walters) 박사팀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곤충에서 최초로 천연부동액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알래스카 딱정벌레는 영하 60도에서도 살 수 있다. 천연부동액은 대부분 단백질이거나 그 조각인 펩티드인 데 비해, 알래스카 딱정벌레 천연부동액은 그보다 훨씬 작은 당류(糖類)와 지방산으로 이뤄져 있었다. 연구진은 "크기가 작으면 훨씬 저렴하고 쉽게 합성이 가능하다"며 "또한 적은 농도로도 효과를 보여 현재 쓰는 고농도 화학부동액보다 세포에 대한 손상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