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공공구매팀 사무실로 LS산전 관계자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중소기업들만 관공서에 납품할 수 있는 분전반(전기차단기·퓨즈 등의 장치)을 대기업도 납품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서를 냈다.

이들뿐만 아니다. 지난달 15일에는 삼성전자·LG전자 관계자들이, 다음날에는 삼성LED·LG이노텍 관계자가 찾아왔고 20일에는 현대중공업·효성 직원들이 찾아왔다.

중소기업중앙회관이 난데없이 대기업 관계자들로 붐비는 이유는 연말에 있을 '중소기업간 경쟁 제품' 선정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추천하고 매년 정부가 지정하는 중소기업간 경쟁 제품은 한마디로 중소기업 보호 제품이다. 중앙정부나 시청, 학교 등 공공기관이 이 물품을 구입할 때는 중소기업만 입찰에 참여할 수 있다. 현재 226개로 일단 한번 지정되면 3년간 대기업 참여가 제한된다.

중소기업중앙회 공공구매팀 양갑수 부장은 "대기업이 중소기업간 경쟁 제품에 반대 의견을 낸 건수는 2007년 0건, 작년에는 2건이었는데 올 들어 18건으로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대기업 관계자들이 중기중앙회 찾는 이유

경기 침체와 중소기업의 반발을 의식해 중소기업 분야로의 진출을 자제해 왔던 대기업들이 경기가 회복됨에 따라 '먹을거리'를 찾아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품목에서는 중소기업과 갈등이 일어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참여를 요구한 제품은 가로등, 경관(景觀) 조명, 정수기, 대형 냉장고, 보안용 카메라, 소용량 변압기, 학교 교실용 인터렉티브 보드(대형 TV를 칠판 대신 설치해 선생님 컴퓨터와 연결해 수업하는 장치) 등이다. 기업별로는 LS산전이 8건 제품에 대해 이의 신청을 내 가장 많았고 LG전자 5건, 삼성전자·삼성LED·LG이노텍·코오롱 등이 1건이었다.

계측(計測)제어장치도 그중 하나다. 계측제어장치란 일종의 계량기로 상·하수도 시설에 설치돼 물의 양을 감지하고 방류량을 조절하는 장치. 마을 단위의 소규모 상·하수시설에 들어가는 제품의 경우 1991년부터 법률에 따라 중소기업 제품만 쓰게 돼 있다. 하지만 한 대기업은 최근 중소기업중앙회에 대기업도 이 분야에 진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계측제어장치를 만드는 중소기업 모임인 자동제어조합의 이효차 전무는 "20년 가까이 중소기업이 해왔던 품목까지 대기업이 진출하겠다니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 전무는 "지금도 공공 부문 이외 분야에 설치되는 계장장치의 경우 대기업이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다"며 "연간 300억원인 공공시장을 놓고 매출 1조원이 넘는 대기업과 120개 중소업체가 싸운다면 중소기업들은 대부분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은 "시장 논리", 중소기업 "불공정 게임"

대기업들이 공공 구매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이유는 최근 경기 회복으로 각 대기업들이 신규 사업을 찾고 있는데다 공공기관 납품을 통해 안정적으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대기업측은 대규모 자본과 연구인력을 갖춘 대기업이 진출해야 해당 분야의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산업 경쟁력도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이 지금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 민간 시장이나 세계 시장을 놔두고 공공시장까지 뛰어들 경우 중소기업들이 고사할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중소기업청은 이달 15일까지 중소기업중앙회에 접수된 의견을 받고 다른 정부 부처들의 의견을 모아 대기업 참여 제한 품목을 최종 고시하게 된다.

중소기업청 공공구매판로과 이병권 과장은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과 경영 안정이라는 법 취지에 맞게 심사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