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라인 게임 업체 웹젠의 이세진 중국 법인장은 올 7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게임 전시회 '차이나조이'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자사 온라인 게임 '뮤'를 꼭 빼닮은 '뮤X'가 등장했기 때문.

더 황당한 것은 뮤X를 개발한 중국의 더나인이 뮤를 현지에 서비스하는 업체라는 사실이었다. 뮤에서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허락 없이 자체 후속작을 만든 것이다. 이 법인장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게임이 정식 출시되면 그때 얘기하자"는 대답만 돌아왔다.

수출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돌파하며 차세대 전략 상품으로 떠오른 한국 온라인 게임이 중국산 '산자이 게임'에 골치를 앓고 있다. '산자이(山寨·산적들의 소굴)'는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짝퉁 현상을 일컫는 유행어이다. 삼성전자 휴대폰 '애니콜'을 베낀 '애니켓'이 대표적인 산자이 제품이다.

특히 온라인 게임은 겉으로 보이는 유사성만으로는 표절 여부를 가리기 어렵고, 중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법적 대응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 더 큰 피해를 보고 있다.

한국 KOG스튜디오가 개발한‘엘소드’(왼쪽)와 이를 베껴 만든 중국의 산자이 게임‘동유기’. 캐릭터의 머리카락 색깔을 빼고는 칼을 들고 있는 동작과 게임화면의 구성이 똑같다.

'산자이 없는 한국 게임 없다'

'전기세계·QQ탕·뮤X·카트레이스·슈퍼댄서·동유기·귀취등 온라인·패트릭스·익스트림바스켓볼·오로라블레이드·쾌락서유·열무파티….'

중국에서 그동안 출시된 주요 산자이 게임들이다. 진행 방식만 따온 게임부터 캐릭터와 배경까지 통째로 베낀 게임까지 다양하다. 게임 업계에서는 "중국에 산자이 게임이 없으면 인기 게임 축에 들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다.

특히 중국의 대표 업체들까지 산자이 게임을 거리낌 없이 만들고 있다. 현지 최대 게임 업체인 샨다는 최근 네오플의 '던전앤파이터'와 비슷한 '귀취등 온라인'을 공개했고, 2위 업체인 텐센트넥슨 '비앤비'의 모작(模作)인 'QQ탕'으로 돈을 벌고 있다. 더나인과 나인유 등 10위권 대형 업체들도 산자이 게임을 속속 내놓고 있다.

'산자이 게임'의 범람으로 2000년대 초 70%에 육박했던 한국 게임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작년 한때 20%대로 떨어졌다. 반면 중국 게임은 56.8%로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업체의 시장 점유율 중 3분의 1 정도는 산자이 게임을 통해 거둔 성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

소송하면 오히려 더 손해

한국의 위메이드엔터테인먼트는 2003년 중국의 샨다가 자사 게임 '미르의 전설2'를 그대로 베낀 '전기세계'를 내놓자 저작권 침해 소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지 법원의 노골적인 판결 지연을 견디지 못해 4년 만에 합의금을 받고 소송을 취하했다. 소송을 하는 동안 위메이드는 서비스를 제대로 못해 매출이 크게 줄었다. 반면 샨다는 같은 기간 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나스닥에도 상장, 대표 게임 업체가 됐다.

중국에서의 저작권 소송이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온라인 게임의 표절을 판단하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현지 저작권법의 문제도 있다. 중국에서는 게임 자체를 하나의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게임을 미술 저작물로도 볼 수 있고, 소프트웨어 저작물로 볼 수도 있다는 식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그림과 음악, 프로그램 구성 등을 별도로 저작권 등록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 분위기가 같아도 표절 인정을 쉽게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 베이징 사무소의 박철홍 소장은 "중국에서 게임을 서비스하려면 현지 정부로부터 판호(허가증)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 업체들이 적극적인 소송을 벌이지 못한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문제제기 필요

중국의 온라인 게임 시장은 올해 311억위안(약 5조4000억원) 규모에 매년 30%씩 성장한다. 우리로서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게다가 산자이 게임은 중국을 넘어 해외에서 우리 오리지널 게임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가령 나인유가 한국 게임인 '오디션'을 베껴서 개발한 '댄싱 스타'는 10여 개국에 수출 중이다.

저작권위원회는 지난달 중국 저작권 기관인 판권보호중심과 '한중 저작권 분쟁조정위원회'를 설립, 짝퉁 게임 판단 기준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웹젠의 이세진 중국 법인장은 "자국 기업을 노골적으로 보호하는 중국에서 개별 기업이 산자이 게임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며 "우리도 정부 차원에서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 산자이(山寨)

'산자이(山寨·산적들의 소굴)'는 중국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모조품(模造品) 문화를 일컫는다. 휴대폰·TV·노트북 같은 IT제품은 물론 드라마·영화 같은 문화상품에 이르기까지 산자이 제품은 다양하다. 하지만 외국인들에게 산자이가 단순히 '짝퉁'을 의미하는 것과 달리, 중국 사람들에게는 고대 소설 수호전에서 108 두령이 기거하면서 권력에 대항했던 양산박(梁山泊)처럼 현지 무명 기업들이 세계적인 브랜드에 대항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