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3일, 전 세계 언론은 포르쉐에서 17년간 근무했던 벤델린 비데킹 사장의 사퇴를 비중 있게 다뤘다. 비데킹 사장은 포르쉐를 만년 군소 스포츠카 메이커에서 업계에서 가장 수익률 높은 회사로 탈바꿈시킨 주인공이었다.

비데킹이 몰락한 이유에는 폴크스바겐 그룹 이사회 의장인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 박사가 있었다. 비데킹은 포르쉐가 2005년부터 쌓아온 3조원 넘는 이익을 바탕으로 생산규모가 60배가 넘는 폴크스바겐을 인수하려 했지만, 결국 피에히 앞에 무너졌고 포르쉐는 폴크스바겐에 흡수됐다. 이로써 60년 넘는 두 회사 간의 인연은 마침표를 찍게 됐다.

'폴크스바겐, 가족, 그리고 돈' 순으로 인생의 우선순위를 꼽는 피에히는 193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안톤 피에히는 당시 독일의 저명 엔지니어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법률자문을 맡다가 1928년 포르쉐 박사의 딸인 루이제와 결혼했다. 이 같은 집안 내력 덕분에 피에히는 일찍부터 자동차 마니아가 됐다. 1962년 취리히 연방공대를 졸업하고 포르쉐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천부적 엔지니어 소질을 바탕으로 미래 CEO감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71년, 포르쉐의 주식을 절반씩 가진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 가문이 경영권 다툼을 벌였고, 양쪽 모두 포르쉐 경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 때문에 피에히는 1972년 아우디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아우디가 속한 폴크스바겐 그룹에서 36년에 걸친 화려한 경력을 시작한다. 그는 디젤 직분사엔진인 'TDI'와 4륜 구동시스템 '콰트로'를 성공적으로 개발, 개발담당 임원까지 오른다. 그러나 독선적 성격으로 상사와 갈등을 빚게 됐고, 이후 일본으로 이주해 혼다에서 근무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타고난 승부사였던 그는 1988년 아우디 최고경영자, 1993년에는 경영난에 빠진 모기업 폴크스바겐의 최고경영자까지 오른다. 피에히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노조, 그리고 폴크스바겐의 대주주이기도 한 니더작센주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제품, 제품 그리고 제품만이 살 길이다'라며 제품군을 혁신적으로 바꿨다. 부가티, 람보르기니, 벤틀리 같은 고급 차 브랜드를 인수했다. 2002년 나이 제한에 걸려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이사회 의장을 맡았지만, 심복들을 그룹 내 요직에 심어 실권을 장악했다.

포르쉐 엔지니어 시절의 피에히(사진 오른쪽)

도요타를 제치고 세계 1위 자동차 그룹이 되고자 했던 그에게 최대 위기는 친정인 포르쉐에서 나왔다. 포르쉐 CEO인 비데킹은 폴크스바겐과 SUV를 공동개발(이후 포르쉐에서는 카이엔, 폴크스바겐에서는 투아렉, 아우디에서는 Q7로 출시)하면서 폴크스바겐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당시 저평가돼 있던 폴크스바겐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여 최대주주 등극을 시도한다. 비데킹은 포르쉐 이사회 의장이자 피에히의 사촌인 볼프강 포르쉐의 지원 아래 2005년부터 폴크스바겐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 결국 2008년 말 33% 이상을 인수했다. 연산 10만대의 포르쉐가 연산 600만대의 폴크스바겐 그룹을 자회사로 편입하게 되는 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피에히에게 2008년의 경제위기는 '천우신조'였다. 포르쉐는 무리하게 빌려온 자금(총 12조원)이 경제위기로 회수당할 처지에 놓이자, 어쩔 수 없이 자본금이 많은 폴크스바겐에 도움을 청했고, 피에히는 궁지에 몰린 볼프강 포르쉐를 압박해 비데킹을 쫓아내는 동시에 포르쉐를 폴크스바겐 그룹의 10번째 브랜드로 편입한다. 그가 도요타를 제치고 폴크스바겐 그룹을 세계 1위 자리에 올려놓을지 업계가 주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