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오너 체제 복귀를 고민 중이다.

지난 5월 대법원에서 '경영권 승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무죄로 내려진 뒤, 주요 계열사의 일부 CEO들이 최근 '오너 체제 복원' 문제를 공개 석상에서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적 영상가전전시회(IFA)에 참석한 삼성전자 완제품(DMC) 부문장 최지성 사장은 5일(현지시각) 기자 간담회에 이어 본지 기자를 만나 "회사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며 "다시 오너 경영체제로 돌아가는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경영쇄신안을 발표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2008년 4월 이후 삼성 주요 계열사 CEO가 '오너 복귀'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최 사장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회사 전체의 힘을 한곳에 모아야 할 경우가 많지만 현 체제에선 불가능하다"며 "과감하고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른 모든 책임을 질 오너 경영자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지성 사장

최 사장뿐만 아니라 다른 삼성 CEO들도 '오너 체제 복원'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근 계열사 사장을 만나보면 '위기 속에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삼성 특유의 '삼각편대식 경영체제'가 절실한 시점'이라는 말을 많이 하신다"고 말했다. 삼각편대식 경영체제란 오너와 전략기획실, 각 계열사가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는 경영체제를 말한다.

현재의 실적이 최근 4~5개월간 경영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4~5년 전부터 위기를 대비하고 치밀하게 잘 준비해온 덕분이며, 그것은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윤부근 삼성전자 TV 부문 사장도 최근 "삼성 TV가 소니를 제치고 세계 1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건희 전 회장님이 수년 전부터 영상사업 분야를 집중적으로 강조하며 과감하게 투자를 이끌었기 때문"이라며 "계열사 자원을 집중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오너 체제여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삼성 모든 계열사에서 엔지니어 4백여명을 차출, TV사업부에 배치했다. 이런 고급 인력이 한데 뭉쳐 삼성 TV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나 오너 체제가 해체된 이후에는 수조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투자나, 계열사 간에 중복되는 사업의 조정, 여러 계열사를 동원해 추진할 신성장동력 사업에 대한 투자가 자꾸 미뤄지고 있다.

특히 사업부문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계열사 간 협력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지금 같은 상황이면 삼성 TV를 일류로 만들었던 집중력은 절대로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요즘이 삼성으로서는 심각한 위기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단계에서 삼성이 오너 체제의 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작업을 추진 중인 것은 없다. 아직은 오너 체제 복귀 문제를 '고민 중'인 단계라는 것이 삼성측의 공식 입장이다.

현실적으로 이 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복귀하려면 '사면·복권'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한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보통 8·15 광복절 때 대규모로 있었고, 연말과 3·1절에 있었던 적도 있다.

삼성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의 재판 결과가 확정된 지 이제 1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면·복권 문제를 끄집어 내기엔 이르지 않겠느냐"며 "당장 사면·복권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간 단계로 과거의 구조조정본부나 전략기획실 기능을 담당할 조직을 일부 복원하거나,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역할을 더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 이재용 전무가 내년 인사 때 공식 보직을 맡으며 경영 전면으로 한 걸음 더 나설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 전무는 작년 4월 경영쇄신안 발표 당시 삼성전자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현재는 직책 없이 해외 사업을 주로 챙기고 있다.

[삼성이여, 자만에 빠진 소니의 전철 밟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