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경기도 이천시 아미리에 있는 하이닉스반도체(이하 하이닉스) 건물 안은 4~5m 앞 사람들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둠침침했다. 일부 생산라인을 빼고는 경비절감을 위해 전체 사업장 조명의 40%에 달하는 '10만등(燈) 끄기 운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복도 끝 현관에는 '버티면 생존,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최진석 부사장은 "반도체 사상 최악의 불황"이라며 "살아남는 자가 승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닉스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눈물겹다. 하이닉스는 7일 희망퇴직, 무급휴가 등을 포함한 인력조정을 결정했다. 작년 말 대비 주요 메모리반도체 제품 가격이 이미 50% 넘게 폭락했지만, 반도체 불황이 더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력 외에 연구개발·인사·총무·영업·공정까지 하이닉스는 생존을 건 전사(全社)적 비용절감 작전에 돌입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하이닉스반도체 공장에서 방진복을 입은 직원들이 반도체 가공 장비 앞을 오가며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점검하고 있다. 이천=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허리띠 끝까지 졸라매기

이천공장 곳곳에는 '내복을 입자' 같은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르네상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110여명 인원이 특별팀을 구성, 3500개 비용절감 작업을 진행 중이다. 엘리베이터 층간 운행, 소등(消燈) 같은 비용 절감은 기본이다.

가장 민감한 인력 조정의 경우, 노사가 선뜻 합의했다. 하이닉스의 인력조정안은 2001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이후 최대 규모다. 임원진의 30%를 감축하고, 임금의 경우 최고경영자 30%, 기타 임원은 10~20% 삭감한다. 근속 10년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고 2주간의 무급 휴직과 연말 집단 휴가도 시행한다.

임원을 제외한 기존 직원들의 고용은 '고통 분담'으로 보장했다. 최근까지 하이닉스는 전 세대(200㎜) 생산라인 4곳을 정리하고 1700여명을 전환배치했다. 노사는 이들을 해직하지 않는 대신, 전 직원들이 인건비를 줄여 이들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하이닉스가 갈 길은 아직 멀다. 반도체 산업은 투자금액이 수조원에 달하고 불황기에는 현금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부증권에 따르면 하이닉스는 내년 만기 도래 차입금 약 8000억원과 투자 금액 1조~1조5000억원을 고려할 때, 최소 5000억원 이상의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하이닉스는 수익성이 낮은 반도체 생산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을 늘리고 있다. 가격이 급락한 낸드플래시 메모리(MP3플레이어에 주로 쓰이는 메모리 반도체) 생산을 대폭 줄이고 모바일 D램(휴대전화용 메모리반도체) 생산에 집중하는 게 대표적이다. 손수익 상무는 "수익성에 따라 공장을 유연하게 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위기도 이겨냈는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임직원들은 담담한 표정들이다. 2001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2005년 졸업한 전력(前歷)이 있는 탓이다. 이날 하이닉스 사업장 안은 난방비까지 절약해 싸늘했어도 직원들은 담소를 나누며 비교적 밝은 분위기였다.

이상래 기술경영팀 부장은 "2001년은 투자비도 부족하고 내부 원가도 높아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며 "지금도 힘을 합치면 버텨낼 수 있다는 공감대가 퍼져 있다"고 말했다.

워크아웃 당시 하이닉스를 구한 것은 뼈를 깎는 비용 절감과 기존 장비로 50% 이상 생산성을 높이는 '블루칩 기술' 도입이었다. 최근에도 하이닉스는 반도체 패키지용 기판을 한 번에 한면이 아닌 양면으로 생산해 생산성을 2배로 높이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런 기술 개발과 낭비 제거로 올 4분기에만 498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예정이다.

문제는 반도체 호황이 언제 돌아올지이다. 반도체 시장은 불황의 골이 깊어 웬만한 비용 절감만으로는 흑자 전환이 쉽지 않다. 외국 메모리 업체들도 불황 장기전 대비에 나섰다. 일본 도시바는 연말 메모리 공장 가동을 멈추기로 했고, 독일 키몬다는 파산을 피하기 위해 투자 유치협상에 들어갔다. 한두 개 외국 업체가 먼저 무너진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불황이 2~3년까지 갈 수 있다.

최 부사장은 "반도체 산업은 한국인의 기질에 딱 맞는 분야"라며 "쉽지는 않겠지만 위기를 꼭 이겨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