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이후 튼튼해진 줄 알았던 우리나라 시중 은행들이 또다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다.

불과 며칠 전 정부로부터 해외 차입금 지급 보증을 지원받은 은행들은 이번에는 연말까지 도래하는 총 25조원어치의 은행채를 매입해달라고 정부와 한국은행에 손을 벌리고 있다. 시중 은행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유동성(流動性·자금) 위기에 빠졌을까.

은행채 사태

은행채 문제는 지난달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이후 세계 금융시장이 신용 경색에 빠지면서 불거졌다. 과거에 증권사·자산운용사·외국 투자자 등 은행채를 열심히 사주던 기관들이 자금 압박을 받으면서 은행채를 대거 팔아 치우고, 추가 매입(買入)을 중단한 것이다. 현재 은행채는 은행의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다. 2006년 이후 증시 활황으로 예금에서 돈이 빠져나가 펀드로 쏟아지자 은행들이 예금 유출을 막기보다 수수료 수입을 챙기려고 펀드 판매에 주력했다. 이로 인해 부족해진 자금을 은행채로 메웠다. 국민·신한·우리·하나은행 등 소위 4대 은행의 은행채 잔액은 몇 년째 계속 증가 추세다.

하지만 채권시장에서 은행채를 팔기가 힘들어지고 금리까지 1년 전보다 2%포인트가량 높은 연 8%대에 육박하자 은행들은 만기가 돌아오는 은행채를 상환할 자금을 구하지 못할 형편이 됐다. 결국 한계에 직면한 은행권은 한국은행에 "은행채를 사달라"며 지원을 요청하고 나섰다. 국민의 혈세로 은행의 유동성 위기를 막아달라고 요청한 꼴이다.

은행들은 동시에 연 7%대의 고금리 예금을 경쟁적으로 내놓으며 시중의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로 인해 시중에서 돈을 구하지 못한 제2금융권과 증권업계 등으로 자금난이 확산되고, 금리가 재차 오르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춰도 시중 대출금리가 오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이 금융시장에 돈이 돌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빨아들여 금융시장을 어렵게 만드는 '블랙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장들의 단기 성과주의가 주범"

은행들의 부실 경영은 지속적인 수익성 하락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2005년 말 4대 은행의 총자산순이익률(ROA)은 1.05~1.25%에 달했으나 현재는 0.78~1.09% 수준이 됐다. 똑같은 돈을 굴려도 이윤 폭이 최대 37%나 줄어든 것이다.

은행들이 IMF 외환위기 이후에도 변한 게 없이 이렇게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는 뭘까. 금융계에선 "은행들의 무리한 몸집 불리기 경쟁과 은행 경영진(은행장)들의 단기 성과주의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 3~4년 사이 국내 은행들은 "대형 은행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M&A와 치열한 자산 확대 경쟁을 벌였다. 그 결과 2005년부터 전국적인 부동산 가격 급등세를 타고 주택담보 대출 경쟁이 격화됐고, 2006년부터는 중소기업 대출과 은행 간 금리 할인을 통한 고객 뺏기 경쟁이 벌어졌다. 2007년에는 은행들간의 신용카드 고객 쟁탈전, 펀드 판매 경쟁도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4대 은행들의 가계 대출은 2005년~2006년 6월 사이 무려 42.5%나 급증했다. 반면 예금은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쳐 국내 은행들의 예대율(예금에 대해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4년 말 평균 99.9%에서 올해 6월 말 평균 126.5%로 급증했다.

이는 결국 은행 경영진들이 장기적인 은행의 발전보다 눈앞의 성과에만 몰입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IMF외환위기 이전의 종금사들에서 볼 수 있었던 경영 난맥상을 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일부 은행장들이 자신의 영달이나 자리 보전, 고액 연봉을 위해 매년 '최대 성과'에 집착한 것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은행채(銀行債)

은행들이 중장기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 2006년부터 증시가 활황을 보이자 은행들은 펀드 판매로 생기는 수수료 수입에 치중했다. 이 때문에 예금이 늘지 않고 자금이 부족해지자 은행들은 은행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