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속의 아바타를 이용한 심리실험 모습.

인터넷 가상현실이 21세기의 새로운 실험도구로 부상하고 있다. 게임 속에서 발생한 전염병을 분석해 현실 세계의 전염병 확산형태를 연구하고, 인터넷 가상현실 커뮤니티에서 자폐증 환자를 치료한다. 가상현실에는 달 탐사에 나선 우주인과 지구의 연구자를 연결해주는 우주공간도 마련됐다.

생물테러 일삼는 게이머도 등장

영국 BBC 방송이 발간하는 과학잡지 'BBC 날리지(Knowledge)'는 최신호에서 과학연구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다양한 가상현실을 소개했다. 가장 주목 받고 있는 가상현실은 인기 절정의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게임 속 가상도시에서는 2005년 '썩은 피'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바이러스는 전염성이 너무 높아서 보균자 근처에만 가도 감염될 정도로 사정없이 번졌다.

세컨드 라이프에 만들어진 미 항공우주국의 화성탐사 공간 코랩.

지난해 3월 이스라엘 벤구리온대 연구진은 의학저널 '역학(epidemiology)'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게임과 현실에서 일어난 전염병의 두 가지 대표적인 유사점을 밝혔다.

먼저 게임 속에서 감염자들은 비행기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순식간에 전 세계에 전염병을 전파했다. 이는 중국에서 시작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두 번째로 게임에서도 동물이 전염병의 주요한 매개체였다. 조류인플루엔자가 닭과 오리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임은 전염병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점쳐보는 수단도 되고 있다. 현실세계에서 전염병이 퍼진 지역을 떠나는 것처럼, 어떤 게이머는 전염병이 퍼지자 게임을 중단했다. 하지만 일부 게이머는 자신의 게임 캐릭터가 감염되면 적극적으로 다른 캐릭터에게 다가가 전염병을 전파했다. 연구진은 이를 "최초의 가상현실 생물테러"라고 규정했다.

반면 아프리카에서 치명적 바이러스성 전염병인 에볼라(ebola) 치료에 자원했다가 감염돼 목숨을 잃은 의료진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감염자들을 치료하는 게이머도 있었다.

인터넷에 등장한 우주

인터넷 가상현실 커뮤니티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도 과학자들의 연구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 세계 1300만명이 넘는 네티즌이 세컨드 라이프에서 자신의 분신인 아바타(avatar)를 통해 다른 사람과 만나고 대화를 한다. 미 항공우주국(NASA)은 이곳에 코랩(colab)이라는 우주공간을 구현했다.

코랩에는 2006년에 화성탐사로봇 오퍼튜니티가 탐색했던 빅토리아 분화구가 그대로 구현돼 있다. 화성에서 로봇이 탐사를 하면 새로운 장면이 추가된다. 인터넷에만 접속하면 화성탐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지구에 있는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화성이나 달 탐사에 나선 우주인들이 직면한 문제점을 현실처럼 느낄 수 있다. 나사는 달 표면을 정확하게 재현한 가상 모형도 만들어 누구나 아바타로 달을 탐사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원자력발전소도 들어섰다. 미국 덴버대학 연구진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로부터 2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핵물리학자들이 플루토늄을 실제로 만지지 않고서도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사이랜즈 섬'을 세컨드 라이프에 마련할 계획이다.

미 텍사스대는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 증후군(Asperger syndrome) 환자 치료에 세컨드 라이프를 활용하고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결여돼 있다. 의료진은 세컨드 라이프에 들어가 환자의 아바타와 대화하면서 다른 사람과 교류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환자들은 병원에서 하는 역할극보다 가상현실 속의 만남에 더 열중해 치료효과도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인터넷이 21세기형 실험실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