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물리연구소(CERN)에서 인류 최대의 과학 실험장치인 '거대 강(强)입자 가속기(LHC·Large Hardron Collider)'가 가동을 시작한다. LHC는 우주 탄생 당시를 재현해 물질 생성의 비밀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LHC에서 우주 탄생 당시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블랙홀이 생겨나 지구를 순식간에 빨아들일 수 있다는 것. 물리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블랙홀에도 수명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과학적 무지"라고 반박하고 있다.

인공 블랙홀은 순식간에 사라져

지난 3월 미국의 전직 교사인 월터 와그너(Wagner) 등 6명은 "블랙홀이 생겨날 우려가 있다"며 안전성이 확인될 때까지 LHC 가동을 막아줄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하와이 연방 지방법원에 제기했다.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는 지구가 LHC가 만든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내용의 컴퓨터 그래픽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블랙홀은 태양의 2배 이상 되는 천체가 점 하나로 쪼그라든 상태다. 엄청난 질량이 한 점에 모여있어 만유인력에 따라 주변의 물질을 모두 끌어당긴다. 심지어 빛마저도 빨려든다.

LHC에선 실제로 블랙홀이 만들어질 수 있다. 블랙홀은 태양이 한 점으로 쪼그라들 듯 아주 좁은 곳에 에너지가 집중될 때 생성된다. LHC가 가동하는 순간 에너지가 어떤 한 영역에 집중되면서 블랙홀이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김수봉(49) 교수는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 순간적으로 모두 만족됐을 때 LHC에서 블랙홀이 생성될 수는 있겠지만, 생성 직후 즉각 사라져 인류에 피해를 입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블랙홀은 모든 물체를 빨아들이는 한편, 엄청난 복사 에너지를 빛의 형태로 내뿜는다. 이때 블랙홀이 내뿜는 에너지가 높을수록 블랙홀의 수명은 그만큼 짧아지게 된다. LHC에서 형성될 수 있는 블랙홀은 온도가 1억의 1억배인 1경(京)도로 엄청난 고온이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의 박성찬(37) 박사는 "LHC에서 블랙홀이 만들어져도 수명은 1/1027초의 찰나"라며 "LHC의 블랙홀이 주위 입자를 끌어 당길 정도가 되려면 수명이 1/109초는 되어야 하는 만큼 일각의 우려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인류 최대의 과학실험장치 LHC에서 양성자들을 빛의 속도에 근접할 정도로 가속시켜 정면 충돌시킨다. 이때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면서 블랙홀이 발생할 수 있다. 사진 속의 사람 크기로 LHC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힉스 입자 못 찾으면 더 큰 재앙

LHC의 블랙홀이 지구의 첫 블랙홀도 아니다. 김수봉 교수는 "지구로 진입한 수도 없는 우주입자들이 대기의 입자들과 부딪혀 블랙홀이 순간적으로 생성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며 "LHC의 블랙홀이 생성된다 해도 우리에게 위험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오히려 물리학계는 다른 점을 염려한다. LHC 때문에 현대물리학을 처음부터 새로 쓰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LHC는 '힉스(Higgs)'라는 가상의 입자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낸 모든 소립자들은 힉스 입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일 힉스 입자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지난 100년간 이룩한 현대물리학에 치명적 결함이 발생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LHC 가동 후 3년 정도 지나면 힉스 입자의 존재 여부가 판가름날 것으로 예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