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방영된 TV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 세종이 일식(日蝕)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세종이 천문을 담당하는 서운관(書雲觀)의 보고에 따라 일식에 대비한 예식을 준비했지만, 일식이 예상과 달리 늦게 시작되자, 세종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이를 "하늘이 세종을 거부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나온 것이다.

왕이 정치적으로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서운관이 일식 예측을 틀리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 조선이 중국의 역법을 빌려 우리 하늘을 해석한 데 따른 오차였다.

중국 역법이 일식 예측 오류의 원인

일식은 달이 해를 가리는 현상을 말한다. 해와 지구 사이에 달이 끼어들면서 환한 대낮이 일시적으로 껌껌해지는 것이다.

서운관은 세종 4년인 1422년 음력 1월 1일 일식이 발생할 것으로 세종에게 보고했다. 당시 일식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천명(天命)을 받은 군주가 통치를 잘못해 일어나는 재해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일식이 발생하면 왕과 신하들은 예를 갖추고 일식을 기다렸다.

세종 역시 소복을 입고 예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예측보다 1각(刻)이 늦어졌다. 1각은 현재 시간 단위로는 14.4분에 해당한다. 조선왕조실록은 1각을 늦게 예측한 책임을 물어 세종이 일식 담당인 이천봉(李天奉)에게 곤장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세종은 일식 예측 오류의 원인을 반대 측 신하들이 주장하는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과학에서 찾았다.

당시 서운관은 중국이 기록한 칠정(七政)의 자료를 바탕으로 달의 위치를 예측했다. 칠정은 해와 달,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다. 세종은 서운관이 우리의 하늘을 중국의 천문으로 해석하는 데서 오차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이순지·김담 등을 시켜 우리의 하늘에 부합하는 새로운 천문역법을 개발하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칠정산내외편'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안영숙 박사는 "당시 일식을 예측하는 기초 자료와 계산법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세종은 예측 오류의 원인을 부실한 조선의 과학에서 찾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세종대 칠정산외편, 정확한 일식 예측 성공

이순지, 김담 등은 세종의 명을 받아 중국의 최신 천문학을 바탕으로 우리의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역법을 개발했다. 1442년에 칠정산내편이, 1444년에 외편이 각각 편찬됐다.

중국의 역법을 기본으로 한 내편보다 아랍의 역법을 가미한 외편이 보다 정확했다. 내편은 1년을 365일5시간49분12초로 봤지만, 외편에서는 365일5시간48분45초로 현대의 기준(365일5시간48분46초)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중국의 최신 역법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정확한 천문서를 만들 수는 없었다. 중국의 하늘과 우리의 하늘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식만 해도 당시 중국 역법은 베이징(北京)을 기준으로 해서 예측을 했다. 베이징은 서울보다 서쪽에 있어서 달이 해를 침식하는 시점이 서울보다 빨라진다. 당연히 일식도 먼저 일어난다.

세종대의 학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뛰어난 천문서를 작성하게 됐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학계에서는 당시 중국 최고의 천문서를 도입해 이를 우리의 하늘에 떠있는 해와 달의 위치에 맞춰 보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외국어대 박성래 교수는 "세종 당대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도구들이 개발됐고, 최고의 학자들을 중국 역법 연구에 투입했다"며 "이로 인해 당시 역법이 크게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칠정산외편도 처음에는 부정확했다. 세종 28년인 1446년 일식을 예측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칠정산외편을 다시 보정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칠정산외편은 그 1년 뒤인 1447년(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50분27초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다시 내놓았다. 당시 천문서 연구는 온 백성의 관심사였다. 마치 거대 국가 과학사업의 성공 여부를 확인할 때처럼 숨죽이며 결과를 지켜봤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칠정산외편은 일식의 시작인 초휴(初虧)와 끝인 복원(復元)을 1분 내외의 오차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예측했다.

초휴는 칠정산외편의 예측보다 48초 늦게 시작됐다. 복원의 경우는 칠정산외편이 오후 6시55분53초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1분여 일찍 끝났다. 하지만 당시 시간 단위인 각, 초를 현재 시간 단위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일부 오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의 정확한 예측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외대 박 교수는 "당시 독자적으로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곳은 아랍, 중국 정도였다"며 "이런 점을 감안하면 세종대에 정확하게 일식을 예측한 것은 대단한 천문학적 성과"라고 말했다.

칠정산외편에서 세종 29년(1447년) 음력 8월 1일에 발생한 일식이 끝나는 복원 시각을 예측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노란색 덧칠한 부분)

조선 중·후기에는 다시 예측 틀려져

칠정산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은 정확한 일식, 월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차는 커져 갔다. 조선 중기인 1603년(선조 36년)에 이르러서는 오차가 30분 이상으로 늘어났다.

하늘은 늘 한결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지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전축과 공전궤도가 달라진다. 특히 자전축의 방향이 달라지면 지상에서 관측하는 모든 천체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세종 당시 내놓은 칠정산외편에 담긴 천체 정보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틀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는 이를 고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선조 이후로는 오차가 더 확대되고,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조선의 천문학도 곤두박질을 치게 됐다. 숙종 때에는 총 25회의 일식 가운데 20회만 사서에 기록됐다.

조선의 천문학이 다시 정비된 것은 영조대에 와서였다. 중국의 개량된 역법인 시헌력을 도입해 일식을 비롯한 역법 전반을 재정비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정조와 순조 때에는 비교적 예측이 잘 들어맞게 됐다. 이후 다시 조선 말기 고종대에 와서 일식 예측은 다시 부실해진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안 박사는 "순조 이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종 때에 다시 예측이 틀리게 된 것은 과학기술의 문제라기보다 당시 혼란한 시대에 따른 행정 착오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