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온라인 게임업체 엔씨소프트가 개발중인 ‘리니지3’의 핵심기술이 일본 게임업체에 유출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경찰이 수사를 벌이고 있다. 작년 초 개발에 들어간 ‘리니지 3’은 엔씨소프트의 대표작인 ‘리니지1’과 ‘리니지2’를 잇는 대작 온라인 게임으로 기대를 모아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기술이 새나갔을 경우 피해액이 최대 1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사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추정 피해액 규모가 엄청나다는 사실에 놀랐다. 엔씨소프트측은 “리니지1과 리니지2가 그동안 올린 매출액이 1조5000억원을 넘는 점을 감안하면 잠재적인 피해액이 그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엔씨소프트의 리니지3 개발책임자인 박모 실장이 지난 2월 회사 경영진과 마찰을 빚다가 면직당한 것이다. 박 실장과 함께 리니지3를 개발하던 팀원 90여명도 동시에 회사를 떠났다. 이들 중 7명이 일본의 주요 온라인 게임업체에 취업하기 위해 면접을 하는 과정에서 핵심기술을 유출한 혐의가 있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들은 개발이 잠정 중단된 ‘리니지 3’에 인터넷으로 접속해 면접관에게 시연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씨는 아직 비공개 상태인 리니지3에 누군가 접속하면 자동적으로 이를 회사가 알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누군가 외부에서 리니지3를 시연한다는 것을 안 엔씨측은 즉각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지난 4월 10일 박 전 실장이 운영하는 서울 논현동의 사무실을 경찰이 방문,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압수해 갔다. 만약 리니지3의 핵심 기술이 하드디스크 안에 들어 있다면 문제가 커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엔씨소프트 '리니지2'의 캐릭터.

박 실장 등은 “그 문제로 경찰에 다녀 왔지만 경찰쪽에서 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리니지3용으로 만든 그래픽이 일부 나올 수도 있지만, 개발중인 게임에 사용한 것이 아니며 직원들이 무심결에 가지고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엔씨측은 “리니지3에 관련된 모든 디지털 콘텐트는 회사의 중요 자산”이라며 “자신이 개발하던 게임이라고 해서 퇴사 후에도 무단으로 접속하는 것은 엄연한 범죄행위”라고 지적했다. 경찰 수사를 통해 기술유출 논란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양측의 공방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 논란의 핵심 인물인 박 전 실장은 송재경 현 XL게임즈 사장과 함께 리니지1을 개발했다. 리니지2는 박 전 실장이 개발팀을 진두지휘해 만든 게임이다. 리니지1·2는 사실상 엔씨의 전부다. 리니지는 엔씨소프트를 먹여 살리는 게임이다. 회사는 현재 매출의 60~70%를 리니지 시리즈에 의존하고 있다. 리니지 시리즈의 핵심 개발자인 박 전 실장도 회사에서 매년 수억원대의 성과급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리니지도 더 이상 회사를 끌고 나가기엔 지친 것처럼 보인다. 일단 국내 PC방 점유율이 몇년째 하락세다. 작년 3월 18.2%였던 PC방 점유율은 올 3월에는 16.4%로 떨어졌다.

당연히 회사가 시장에서 거둬 들이는 돈도 점차 줄고 있다. 2004년 1089억원이던 회사 영업이익은 2006년 518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97년 첫 등장한 리니지1은 10년이 넘은 장수 게임이다. 20살에 리니지를 시작한 사람들이 지금은 30살이 됐다는 이야기다. 2001년 등장한 리니지2도 7년 동안 회사를 위해 돈을 벌어 왔다. 빠르게 변하는 기술의 특성상 7년이면 이미 노년에 접어 든 게임이다.

그래도 회사가 7년간 리니지 후속편을 내 놓지 않은 이유는 리니지에 대한 사회의 평가 때문이었다. 일단 리니지 시리즈는 중독성이 너무 강해 사람들이 헤어나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임 없이 나왔다. 또 리니지 시리즈의 아이템 현금 거래는 중대한 사회 문제다.

엔씨측은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해외에서 ‘시티 오브 히어로’ ‘길드 워’ ‘타뷸라 라사’ 등 새로운 게임을 시도했으나, 아직 리니지만한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작년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은 “리니지3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리니지와 박 전 실장에게 다시 회사의 미래를 맡긴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박 전 실장은 약 1년간 100명이 넘는 개발팀원을 이끌고 리니지3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박 전 실장을 비롯한 개발팀은 회사 운영방침을 둘러싸고 불만을 품게 됐다. 엔씨에 입사한 개발자는 특별한 업무를 맡지 않고 1년간 ‘개발자 풀’에 들어가 회사 문화를 익히고 교육을 받는다. 한때는 개발풀 소속 인력이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리니지3 개발팀은 이런 구조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엔씨에서 분리, 독립법인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했다. 자신들이 힘들게 일해 번 돈이 성과 없는 해외개발 게임과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교육을 받는 인력의 월급으로 계속 빠져 나간다고 생각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전 실장이 대표로 김택진 사장을 만나 개발팀 독립을 요구했다. 김 사장은 이 요구가 경영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판단, 박 실장을 면직시키고 개발팀원 전체에게 재택근무를 시키는 초(超)강수를 뒀다.

집에 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개발팀원 가운데 90여명이 동시에 사표를 냈다. 회사의 존립이 흔들리는 중대 사안이었다. 황당하게도 사표를 낸 개발자들이 대부분 네오위즈 창업자 가운데 한 명인 장병규씨와 손 잡고 새로운 게임을 개발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장씨는 네오위즈를 나와 ‘첫눈’이란 검색엔진 회사를 운영하다 이를 NHN에 매각해 수백억원을 번 인물이다. 엔씨측은 박 전 실장이 장씨와 미리 게임업체를 차리는 문제를 협의한 다음 회사를 나갈 명분을 얻기 위해 독립법인을 요구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박 전 실장은 퇴사한 개발자 90여명과 함께 서울 논현동에 사무실을 내고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현재 어떤 회사 소속도 아니다. 엔씨를 퇴사한 다음 1년 안에 다른 게임 업체로 옮기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썼기 때문이다.

대부분 게임 업체는 직원이 입사할 때 ‘회사를 퇴직하고 곧 다른 업체로 이직할 수 없다’는 각서를 받는다. 최근 개발자들의 잦은 이직이 게임 업계의 최대 골치거리이기 때문이다. 핵심 기술이 다른 회사로 빠져나가는 것을 예방하자는 의미도 있다. 지금까지는 이직을 문제 삼은 전례가 별로 없었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이런 관행에 제동이 걸리게 됐다.

90명에 달하는 게임업계 실력자들이 사무실을 열고 개발 작업을 하려면 큰 돈이 들어간다. 엔씨측은 이 돈을 장병규씨가 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장씨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개발자들도 경찰 수사 이후 외부 연락이 힘든 상태다.

반면 기술 유출로 인한 피해가 1조원에 달한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과장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온라인게임 제작기술은 이미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평범한 것이며, 프로그램 설계도(소스코드)가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피해규모를 너무 부풀렸다는 주장이다.

게임개발 회사의 최대 자산은 핵심 개발인력이다. 개발자를 관리하고 열심히 일할 분위기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다. 이번 리니지3 기술유출 논란은 개발자에게 최고 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알려진 국내 최대 게임업체도 개발자 관리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