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은행은 9일 오전 임시 주주총회를 열고, 파업 중인 노조가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상장폐지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날 임시주총은 지분 99.33%를 확보해 사실상 1대 주주나 다름없는 씨티그룹 주도로 5분여 만에 상장폐지 안건이 처리됐다.

이에 따라 한미은행은 지난 89년 11월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후 14년여 만에 증시에서 모습을 감추게 됐다. 또 상장폐지로 한미은행 파업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분석됐다.

한미은행 노조는 상장폐지에 대해 “한미은행의 수익을 씨티그룹이 독차지하겠다는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한미은행 노조는 파업 명분으로 상장폐지 철회를 내세운 바 있다. 한미은행 노조 관계자는 “씨티그룹의 한미은행 상장폐지는 결국 국내 자본의 해외 유출을 부추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금융계에서도 씨티그룹에 인수돼 외국기업이 된 한미은행이 시장의 감시로부터 벗어난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증권업계에서는 이번 상장폐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대우증권 구용욱 팀장은 “씨티그룹 전략은 곧 한미은행 수익을 모두 지주회사로 집중시키겠다는 것이며, 국내 투자가들과 수익을 나누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조병문 LG증권 금융팀장도 “상장폐지는 시장의 감시기능이 차단됐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기업 투명성 측면에서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한미은행측은 “상장폐지는, 80% 이상의 지분이 1개 주주에게 집중되면 상장이 자동 폐지되는 증권거래법에 따른 것”이라며 “국내법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하영구 한미은행장은 “공시보다 더 자세한 경영자료를 금융감독원에 보고하고, 미국의 회계기준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므로 상장폐지 때문에 경영의 투명성이 약화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는 외국인이 국내 기업을 인수한 뒤 자진 상장폐지시킨 사례가 종종 있었다. 지난 1994년 나이키가 삼라스포츠를 인수해 상장폐지시킨 것을 비롯, 1999년엔 P&G가 쌍용제지를 인수한 후 상장폐지시켰고, 지난해엔 이베이가 옥션을 등록취소시키기 위해 공개매수에 나섰다가 실패한 바 있다.

한편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은 지난 8일 “금융노조가 오는 13일 파업찬반 투표를 거쳐 15일쯤 쟁의행위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어 그 이전에 한미은행 사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번 상장폐지건으로 한미은행 파업사태의 해결이 불투명해졌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