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성인 행장


지난 4월 김성인 전 제주은행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봉학(金鳳鶴)―성인 부자(父子)」로 이어진 한국 유일의
「은행가(銀行家)」가 31년 만에 무너져내린 순간이었다. 빈소에는
이들이 창업한 제주은행 현직 은행장도 찾지 않았다. 대신 남은 것은
은행장 명의로 발송된 손해배상청구 소송장과 재산 가압류장이다. IMF
외환위기 시대를 겪은 우리 금융인의 「업보」는 죽어도 사라질 수 없는
것일까.

그가 사망한 날은 4월 21일, 혹은 22일이었다. 농약을 마시고 팔을 칼로
그은 뒤 옆 건물 계단 3층 난간에 올라가 25m 아래 콘트리트 바닥에 몸을
던졌다. 가족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절명(絶命) 시각은 분명치
않다. 행인이 시신을 발견한 것은 22일 0시30분쯤.

유서(遺書)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98년 말부터 앓아온 우울증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는 가족들의 증언에 따라, 그의 주검은
부검(剖檢) 절차 없이 자살 처리됐다. 만 59세. 재일교포 출신으로
제주은행을 창업한 아버지 김봉학씨가 일본에서 사망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김 전 행장이 자살하기까지 몇 개월 동안 대인기피증에 걸린 그를 만난
사람은 드물다. 당시 그를 만난 유일한 지인(知人)인 대학선배
김수남(金洙男) 제주산업정보대 교수는 지난 16일 『그는 죽기 직전
「이제 다 망했다」며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극도의 불안감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전 행장은 자살 직전
『숨이 가쁘다』며, 매일 자신의 가슴을 짓때렸다고 한다.

그는 올 2월과 작년 7월 각각 예금보험공사 이인원(李仁遠) 사장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올렸다. 청원서에는 『870억원
이상의 엄청난 손해배상 책임을 물으면서 본인의 재산을 가압류…,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고 적혀있다. 가압류된
재산은 그가 목숨을 끊은 장소인 제주시 삼도2동 자택과 서울 양재동
자택, 제주도 내 토지 등 김성인 명의 부동산의 전부다. 부인
김정온(金貞蘊)씨는 『조국에 수천억원을 투자한 결과, 남은 것은 남편의
죽음』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IMF 외환위기 이후 김성인 일가가 제주은행 회생을 위해 내놓은
사재(私財)는 모두 352억원. 김봉학·성인 부자, 김봉학씨의 동생 2명이
일본에서 각각 250억원과 102억원을 가져와 증자에 참여했다. 부인
김씨는 『당시 고위 당국자가 남편을 불러 외자(外資)를 유치해 증자에
성공하면 은행과 대주주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99년 7월 대우 사태가 터지면서 이 약속은 백지화되고, 2000년 말
제주은행의 모든 주식은 폐기됐다.

지난 80년대 가족들과 함께 한 야유회의 모습.사진 오른쪽 끝이 김성인 전 제주은행장, 왼쪽 끝이 아버지 김봉학 제주은행 창립자이다.가운데는 부인 김정온씨.

김성인 전 행장의 아버지 김봉학씨는 유명한 재일교포 재력가이자
70~80년대 한국 정재계(政財界)의 실력자였다. 제주은행 증자에 참여한
돈은 그가 일본에서 만든 화학회사 「천마(天馬)」 주식을 담보로 일본
은행에서 꾼 150억원이었다. 19년간 김봉학씨를 모신 이상철(李相喆) 전
제주은행장은 『중풍에 걸려 10년째 말도 못하던 그가 「제주은행을 위해
지분(일본회사)을 내놓자」는 아들의 말에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말했다.

김봉학씨가 일본에서 2억원을 들고와 제주은행을 설립한 것은 지난 69년.
1946년 「제주도 4·3사태」 때 좌익을 피해 고향 제주도를 떠나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23년 만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본
「훌라후프」(허리로 빙빙 돌리는 플라스틱 링)를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지인(知人)들에게 『일본 사람들이 공장 앞에 돈을
들고 떼지어 기다렸다』고 회고했다. 「훌라후프」로 일어선 그의 회사
「천마」는 재일교포 기업 최초로 지난 88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이상철 전 행장은 『그는 「25년 동안 하루 4시간 이상 잔 일이
없다」면서 「근면」을 은행 여신의 기준점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차를 타고 제주도 내 시장을 돌아다녔다. 이 전
행장은 『새벽에 문을 여는 가게, 특히 부부가 함께 문을 연 가게를 보면
상호(商號)를 메모한 뒤 무조건 돈을 빌려줬다』고 말했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90년대 초반까지 제주은행은 부실이 거의 없는 「알짜은행」으로 제주도
경제의 핵심에 자리잡았다.

아들 김성인 전 행장은 초등학교 때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 졸업 후 일본
스미토모(住友)은행에서 3년간 일한 뒤 72년 제주은행 업무부장을
맡았다. 이후 기업의 과잉투자가 절정에 달한 95년 제주은행장에 취임,
IMF 외환위기 와중인 98년 12월 경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동안
관계를 맺은 대우·기아·아세아자동차 등 「육지 기업」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은행도 몰락했고, 결국 2186억원의 공적자금을 받았다.

주변 인물들이 기억하는 김성인 전 행장의 일생은 소박했다. 전 제주은행
박만옥(朴萬玉) 전무는 『친구도 측근도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제주은행 임윤식(任崙植) 전 이사는 『정치인이 돈을 요구하면 그는 은행
돈이 아닌 개인 돈을 줬다』고 기억했다. 과거 기록을 보면, 김성인
부자는 제주은행에서 배당받은 이익금을 대부분 은행에 재투자했다.
제주은행을 통해 사재(私財)를 불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족들은 『자기
은행인데, 향응을 받으면서 기업에 대출했겠느냐』고 말했다.

금융권에선 김성인 부자를 금융 구조조정 과정의 「최대 희생자」로
꼽는다. 은행을 살려준다는 정부 약속에 거액의 사재를 날리고 결국
소송까지 당해 남은 재산까지 사라질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한 그의
인생은, 확실히 「죄」보다는 「벌」이 무거운 경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은행 손배소송을 담당한 예금보험공사 박시호(朴市浩) 조사부장은 『과거
노력을 감안해 김 전 행장만 예외로 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제주은행은 공적자금을 받은 뒤 작년 말 신한지주회사에 편입됐다. 이후
김성인 부자의 가족사(史)는 제주은행에서 사라졌다. 지난 16일 기자가
이 은행 본점을 방문했을 때 은행 관계자는 『남아있는 사진이 없다』며,
은행사(史) 책자에 실린 증명사진 한 장만을 가위로 오려줬다.
제주은행은 김성인 전 행장의 유족에게 15억원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그가 자살한 지금도 진행 중이다.

( 제주(濟州)=鮮于鉦기자 jsunwoo@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