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야스

봉제품 수출을 앞지르기 시작한 섬유제품은 메리야스
제품이었다. 메리야스란 실 한 가닥으로 만든 옷가지를
말한다. 티셔츠, 팬티, 양말, 스웨터, 장갑 같은 것들이다.
1965년도에 봉제품과 비슷한 1109만 달러어치의 수출을
기록했던 메리야스 제품은 이듬해엔 2519만 달러, 68년에는
6538만 달러어치의 수출을 달성했다. 스웨터는 스웨덴에
특히 많이 수출되었다.

한때는 스웨덴 사람들 두 명중 한

명은 한국산 스웨터를 입었다. 메리야스 공장도 주로 여공들로

채워졌다. 섬유수출전선의 일선 사단장격이던 오원철

상공부 공업1국장이 서울 용산 삼각지 근처 미원산업을

방문했다. 여사장이 안내했다. 긴 작업대에 붙어 앉은

여공들이 열심히 수를 놓고 있었다. 천에 수를 놓는 것이

아니라 스웨터 위에 각종 색깔의 털실을 가지고 큼직한

무늬를 뜨개질하고 있는 것이었다. 꽃도 있고 동물도 있고

집도 있었다. 제품 진열실로 안내한 여사장이 말했다.

"스웨터 값을 제대로 받으려면 디자인이 중요합니다. 같은
모양은 일시에 많이 팔리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을
소량 만들어야 합니다. 바이어가 와서 소량, 다종을 주문하기
때문입니다."

이해 한-일무역실무자 회의가 상공부에서 열렸다. 오원철
국장은 디자인문제를 거론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한
일본인이 오국장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디자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한국도 많은 진보를
했다고 생각되는군요. 디자인은 딴 나라에서는 수입할 수
없는 분야라서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디자인은 유행 따라
변하니까요. 오히려 디자인이 유행을 창조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모직, 견직물 수출의 부진에서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던 오원철은 서울대 미대 이순석 교수를 찾아가
의논했다. 세 가지 대책이 제시되었다. 첫째,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상공미술대전을 매년 개최한다. 둘째, 디자인
센터를 만들어 인재를 모으고 업계를 지원한다. 우선 포장지와
글씨 디자인부터 연구한다. 셋째, 각 대학에 디자인과를
증설한다.

봉제품과 메리야스 제품과 함께 면제품의 수출도 늘었다.
1964년에 1278만 달러, 68년엔 2109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면제품은 옷을 만드는 원재료이다. 수출용 봉제품에 대한 원단으로
공급되고 남은 것을 수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공부는 면직물을
짜는 직기가 일제시대에 설치된 것이 대부분이라 이를 신식직기로
대체시키는 데 주력했다.

1938년 미국에서 발명된 나일론은 합성섬유 시대를 열었다. 1959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나일론 필라멘트(나일론 실)가 수입되었다. 이
필라멘트를 가공하여 제품을 만들기 쉽도록 하는 것을 스트레치라고
하는데 이런 가공공장들이 1964년 현재 16개소가 있었다. 재일동포
출신인 이원만, 이원천 형제는 대구에 한국 나일론이라는 스트레치
공장을 갖고 있었다. 형제는 1963년엔 일산 2.5t의 나일론
원사공장을 준공했다. 이것이 한국 합성섬유 공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듬해엔 이병철, 조홍제가 한일나일론 공장(뒤에 동양나일론에
흡수)을 세웠다.

이해 경남모직의 김한수 사장이 마산에 일산 7.5t의 아크릴파이버
공장(한일합섬)을 건설했다. 1968년엔 면방업체들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울산에 일산 6t짜리 폴리에스텔 공장을 세웠다. 선경합섬,
동양나일론, 고려합섬 등 합성섬유 공장들이 잇따라 세워지면서
섬유공업은 전방위로 발전, 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제조업 종사자들은 국군 장병숫자(약60만)보다도 약간 적었다.
섬유공업에는 약 11만 명의 종업원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여성인력이었다. 이 훈장없는 여전사들에 의해서 수출전선이
지탱되었다. 오원철은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과 그들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비가 안오면 농민을 생각하며 걱정했고 여공이 땀을
흘리면 닦아주고싶었다. 지금도 그들 생각만 하면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라를 구해주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싶어진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느 날 마산의 한일합섬 공장에 들렀다. 수천명의
여공들이 수출용 스웨터를 만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앳된
소녀들은 나이보다도 어려 보였으며 키도 작았다. 박대통령은 한
여공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공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영어 글씨를 모르니 감독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눈물이 글썽이는 여공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시선은 옆에서 안내하던
김한수 사장 눈과 마주쳤다. 박대통령이 "김사장"하고 말을 꺼내자
마자 김사장은 "당장 야간학교를 개설하겠습니다. 중학교 과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돈 없어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는데 시설을 충실히 해주시오.
공부한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한일합섬에서는 여공들을 위한 야간고등학교도 설립했다. 박대통령은,
이들에게 수료증은 줄 수 있지만 졸업장을 줄 수는 없다고 버티는
문교부 장관에게 특명을 내려 그런 규정을 뜯어고치게 했다. 공부
못한 한을 품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땀흘려 수출한국의 일선을
지켰던 여공들은 그 뒤 어머니들이 되었고 자식들은 대학졸업생이
되었다. 그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공장마다 여성 노동자들이
모자르게 된다. 30년 뒤의 이야기이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