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철강 부도사건이 발생한 지 3달이 지났다. 한보사건은 단군 이
래 최대 부도사건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충격이 매우 컸고, 또 대출과
정에 외압과뇌물수수가 어우러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치적 파장도 심
각했다. 특히 외국에서 한국경제와 한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해 버렸다. 그러나 그 실체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아 적지 않
은 의문점을 남겨놓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바탕으로 한보사
건의 실체를 경제적 시각에서 진단해 본다.< 편집자 >.

◆ 부도원인 =한보철강은 기본적으로 경영자의 경영능력 부재와
무모한 투자로 인한 자금난으로 도산했다.

정치적으로 「살해됐다」는 해석은 극히 일부의 주장일 뿐이다. 성장
과정에 핵심 정치권이 개입됐고, 부도처리 과정에서 가 개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부도
를 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총회장은 5조원짜리 철강공장을 지으면서 자기돈은 겨우 3천
억원정도만 내놓았다. 도산 직전에는 이자(연간 6천억원)를 갚기 위해
사채를 금리 불문하고 마구 끌어써야 할 정도로 자금사정이 나빴다.

이같은 상황속에서 은행들이 진흙탕에 더이상 물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자금공급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은행들은 그동안 골머리를 앓다
가 정부와 협의 끝에 한보철강을 정리키로 했던 것이다.

와 은 작년 가을부터 한보의 이상징후를 알고 있
었으나 판단착오와 정치실세의 로비를 받아 한보를 일찍 정리하지 못
했다. 이때문에 막판에 나간 8천억원의 구제금융은 별다른 효과없이
그냥 길거리에 내버린 꼴이 됐다.

◆ 외압의 몸통 = 청문회에서도 한보에 은행 금고문을 활짝 열
어 주게 만든 외압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권이
바뀌면 한보사건은 또다시 「빅뱅(대폭발)론」이 대두될 것이라고 금융계
는 추정하고 있다.

외압의 실체로 추측됐던 씨는 청문회에서 외압을 부인했다. 「깃
털론」을 제기, 외압의 실체 의혹을 증폭시켰던 의원도
청문회에서 『깃털론을 부인하면서 외압의 실체는 자신』이라고강조했다.

은행장들도 외압의 실체를 밝히기를 거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철
훈 장은 외압 자체를 부인했고, 장명선 외환은행장은 『로
부터 전화는 받았으나 외압으로 느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시형 총재는 『외압은 있었으나 대출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결국 청문회가 진행되면서 외압의 실체가공
중에 떠버렸다.

하지만 은행권에서는 엄청난 외압 없이는 5조원의 거액이 한보철강
한 곳으로 집중될 수는 없다는 반응. 은행권에서는 『홍 의원이 상도동
가신이지만 홍 의원만 믿고 5조원을 내줄 수 있는 은행장들은 없었을 것』
이라면서 『다음 정권에서 홍 의원 뒤에 숨어있는 엄청난 힘의 실체가 밝
혀지지 않겠느냐』고 입을 모은다.

◆ 경제부처의 책임론 = 경제수석실과 , 통상산업
부-건설교통부 등 한보철강 인허가에 관련된 각 경제부처는 법률적으로
는 「무죄」를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보사건 덕분에 각 경제부처에는 「무사안일과 책임회피에 능
란한 프로집단」이라는 커다란 죄목이 씌워졌다.

사실 한보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관청의 인허가 장벽을 매번 성공적으
로 뛰어넘었다. 공유수면매립허가(88-95년)와 코렉스공법 도입허가(95년),
가스전 투자허가(96년) 등 한보사업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
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은행돈이 펑펑 쏟아져 나가는데도 이 수수방관한 것도 납
득하기 힘들다. 는 이런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과 통산부, 해
운항만청 등에 대해 조사를 벌였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현재 진행중인 감사원 특감에서도 큰 하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사법처리되는 공무원도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경제부처들이 완전 면책을 주장하기는 힘들다. 예컨대 철강
수요 예측을 이유로 현대의 일관제철사업을 불허한 정부가 코렉스공법은
오히려 장려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가스전 투자도 「신고사항」
이어서막을 방법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다른 업체 케이스 때는 신고사항
도 접수자체가 거부되는 일이 흔했다.

특히 한보 부도직전 골칫거리 처리를 맡지 않으려고 각 부처끼리 핑
퐁을 쳤고, 는 뉘늦게 구제금융을 내주라고 강압, 은행들의 반발
을 초래했다.

더구나 부실기업 정리원칙에 일관성이 없는 것도 문제다. 최근 진로
사태에선 그룹오너의 경영권도 보장해주고 구제금융까지 추가제공하는
선심을 썼다. 이때문에 한보-삼미그룹 관계자로부터 『왜 우리는 봐주지
않았느냐』는 불평이 나오고 있다.


◆ 은행원들의 책임 =한보사건은 총회장이 정치실세에게 로비
자금을 뿌린 뒤, 은행에 압력을 가하도록 하여 5조원의 대출을 받아낸 사
건으로 낙착되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한보사건과 관련, 행장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원을 비난하는 은행원들의 목소리는 약하다. 『압력만으로 행장이 대출
해 줬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

특히 과 에선 『전임 행장들이 뇌물도 받았지만, 당시
담당임원-간부들과 은행장들이 상황판단을 잘못해 돈을 퍼주는 바람에 은
행을 말아먹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한보에 뭉텅이 돈이 나간 94년 12억달러의 외화대출의 경우 관련
은행들이 수수료를 따먹기 위해 한보와 서로 거래를 하려고 치열한 경쟁
을 했었다.

그러나 이때 한보거래를 유치한 은행임원-간부들이나 은행장들은 결국
엄청난 착각을 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한번 거액을 퍼주게 되자, 이후 은행장들은 정총회장의 「밥」으로 전락
했다.

특히 전제일은행장은 뇌물로 겨우 7억원을 받고 재무구조 부실
기업인 한보에 무려 8천억원을 대출해주는 「밑지는 장사」를 했다.

이번 한보사건은 은행의 대출심사 기능미비와, 뇌물을 받고 은행재산
을 자기 용돈처럼 마구 써버린 은행원들과 은행장들에게 큰 책임이 있다
는 은행권 스스로의 냉정한 평가다.

◆ 한보철강 회생가능성 =한보철강 재산보전관리인단은 최근 기업
설명회에서 「2001년 이후 흑자실현」 가능성을 주장했다.

관리단은 더 나아가 2001년 흑자, 2007년 누적적자 완전 해소, 2010
년 채무상환 완료라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손근석 사장은 『그동안 저평가 돼왔던 열연 및 냉연코일 가격을 3년
내로 일본 철강재 내구가격의 95%수준으로 끌어올리면 한보철강의 조기
정상화는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이는 조기매각을 추진중인 한보철강측의 과장된 주장일 것이
라는게 철강업계의 지적이다.

한보철강 회생에 가장 큰 걸림돌은 정상가동의 가능성이 불투명한
코렉스 설비. 누가 한보철강을 맡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누적적자와 5조원의 금융부채 부담을 해소할 수 없다는 분석이다.

반대로 1조원의 코렉스설비를 매각할 경우 그에 상당하는 자금을 확
보하는 동시에 전체 금융비용의 20% 가량을 줄일 수 있어 회생가능성은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현재 한보철강 인수를 저울질하고 있는 과 철강전문업체들
도 「코렉스 설비가 없는 한보철강」은 살아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 코렉스공법 시비 =코렉스공법은 첨단 제철공법임에 틀림없다.
이 공법은 세계최고수준의 에는 어느 정도 쓸모있는 공법이지만,
철강초보자인 한보에는 경제성이 없는 공법으로 나타났다.

한보철강의 코렉스 설비에는 무려 1조원 이상이 투입됐다. 코렉스
설비는 철광석과 분탄의 소결과정을 생략, 고로보다 경제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신제선 공법으로 고안된 첨단 설비.

그러나 아직은 실험단계에 머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상용화에 성
공한 사례는 없다.

세계 최고기술을 자랑하는 조차 30만t급 코렉스 설비를 도
입한지 4년이 지났지만, 분탄과 분광을 처리하는 마지막 기술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업인 에는 코렉스설비가 전체 제선(쇳물제조)용량
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므로 실험용으로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한보철강이 핵심 제선설비로 코렉스 공장을 도입했다. 이것
이 문제다.

한보철강 살리기에 나선 팀도 완공시기를 99년이후로 연
기, 당분간 한보의 코렉스설비를 포기한 상태다. 한보 인수후보로 거
론되는 철강업체들도 코렉스 설비에는 넌더리를 내고 있다.

결국 한보의 코렉스는 제3국에 실험용으로 헐값에 매각되거나, 상
당기간고철덩어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 황해제철소 프로젝트 =황해제철소 프로젝트는 무역진흥공사의
소개로 한보가 흑룡강성민족경제개발총공사(흑민경) 최수진(중국교포)
사장과 손잡고 추진했던 선철(전기로 가동 원재료) 도입 계획.

한보가 선철생산에 필요한 코킹코올(제철원료) 구입자금을 최사장
에게 보내주면, 최사장이 원료를 구입해 황해제철소에 공급, 황해제철
소가선철을 생산해서 한보그룹에 보내주는 3각 중개 임가공방식으로 알
려져 있다.

싼 값에 선철을 구입하려는 한보그룹과 원자재 구득난에 빠진 황해
제철소를 어떻게든 가동해야 하는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성사된 대북사업이다.

㈜한보 현지법인 HHI사가 작년 8월 최사장과 선철
도입을 위한 2백70만달러 신용장개설 계약을 맺으면서 황해제철소 프로
젝트는 본격화됐다. (주)한보는 작년 가을부터 올 4월초까지 4차례에
걸쳐 대금을 모두 최사장에게 송금했다.

빠르면 5월중 황해제철소에서 만들어진 선철 1차분(4천t)이 국내에
들어와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전기로 가동원료로 사용될 예정이다. 문
제는 한보가 대북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 사전승인이나 사
후보고를 하지 않았던 것.

이에따라 일부 언론은 한보철강이 남북관계에 깊숙이 관여해 왔던
씨의 힘을 빌려 대북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