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린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는 1983년생이다. 나이를 따지는 한국 사회에서 1980년대생은 아직 젊은 실무진 축에 속하지만, 과학계에선 위상이 남다르다.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는 연구자의 역량과 아이디어가 빛나는 시기로 불린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들이 자신의 핵심 연구를 처음 시작한 평균 연령이 37.9세로 나타났다. 조선비즈는 한국의 기초 과학과 공학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독자들께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다. 젊은 과학자들은 한국공학한림원과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추천을 받아 선정했다. ‘제2의 허준이’를 넘어서 한국의 첫 노벨상 과학 부문 수상자, 그리고 한국 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가 이들에게서 나오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화학과 생명과학 분야의 신기술을 소개하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서드’는 지난 2011년 12월 ‘올해의 기술’로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인 ’유전자 가위’를 선정했다. DNA에서 특정 유전자를 자유자재로 잘라내는 기술이다.이 학술지는 “유전자 가위 기술이 여러 종의 유전체에서 정확한 위치에 원하는 변화를 만드는 능력은 생물에 대한 우리의 질문에 답을 내려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3세대 유전자 가위 기술인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가 등장하기 전으로 1세대 유전자 가위인 징크핑거와 2세대인 탈렌을 중심으로 기술을 언급했다. 네이처 메서드는 기사 말미에서 “유전자 편집을 더 정확하고, 편리하게 할 수 있을 때, 이 기술의 잠재력이 한층 강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 미래는 바로 이듬해인 2012년 세상에 나온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로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실험 중인 배상수 교수. 배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유전자 치료제가 조만간 상용화되고, 미래에는 유전자 전체를 교체하는 기술로 발전할 것"이라고 밀했다. /장련성 기자

배상수(44) 서울대 의대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바꿀 미래의 중심에 서 있는 한국인 과학자다. 그가 개발한 초정밀 아데닌 염기교정 유전자가위 ‘ABE8eWQ’는 2021년 11월 국제학술지인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에 게재되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22년 12월에는 이 공로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선정한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받기도 했다. 1980년생의 젊은 과학자지만 이미 크리스퍼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이력도 특이하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물리학을 전공하고 박사까지 받은 뒤에야 유전자 가위 분야에 뛰어들었다. 같은 과학이라고 해도 물리학에서 화학으로 전공을 바꾸는 건 평생 피아노만 치던 사람이 바이올린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다. 더욱이 배 교수는 학사부터 석·박사, 박사후 과정까지 모든 연구자의 경력을 국내에서 쌓은 순수한 국내파다. 여러모로 우리 과학계에 찾아보기 힘든 사례다.

배 교수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공부하게 된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후 염기 편집의 정확도를 높인 새로운 유전자 가위 개발,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질병 치료제 개발 등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배 교수는 이제 원래 있던 기술을 따라가고 발전시키는 것 보다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유전자 가위를 만드는 도전을 하고 있다. 자동차 엔진의 부품 하나가 고장나면 엔진 전체를 교체하는 것처럼 고장난 유전자 일부를 유전자 가위로 교정하는게 아니라 아예 유전자 전체를 교체하는 기술 개발에 나섰다. 아직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어서 이름도 붙지 않은 기술이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의 유전자 치료를 구현하려면 반드시 개발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소개했다. 배 교수를 지난 31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만났다.

배상수 교수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모두 물리를 전공한 물리학도다. 그러나 유전자 편집 기술에 흥미를 갖게 된 후 진로를 바꿔 유전자 가위 연구를 시작해 현재는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명으로 꼽히고 있다. /장련성 기자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이력이 특이하다.

“학부와 대학원의 전공이 다른 경우는 자주 찾아볼 수 있지만, 대학원과 박사 후 연구원의 전공이 다른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 연구가 하고 싶었다. 대학원에서 생물물리를 전공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생물물리학은 물리적인 도구를 이용해서 생명현상을 관측하는 분야다. 예를 들어 레이저로 세포, 단백질, 디옥시리보핵산(DNA)을 관찰하는 거다. 그런데 결국 이게 생명체는 아니지 않나. 다행히 내가 배웠던 생물물리가 도움될 수 있는 분야가 두 가지 있었다. 신경과학과 DNA였다.”

-그 중에서 유전자 가위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있나.

“대학원을 졸업한 2012년 당시에는 유전자 연구가 지금처럼은 주목받지 못한 시기였다. 그런데 우연히 한 학술지에 실린 기사를 읽게 됐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메서드’에서는 1년에 1번씩 ‘올해의 기술’을 소개하는데, 유전자 편집이 2011년의 기술로 꼽힌 것이다. 이 기사를 읽고 ‘이런 거 개발되면 굉장히 과학계에 큰 변화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다음 진로로 유전자 가위를 선택했다.”

-해외 경력이 전혀 없는 점도 눈에 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다. 만약 박사 학위를 받은 생물물리학을 그대로 공부했다면 해외에 나갔을 수 있겠지만, 진로를 바꾸면서 해외로 바로 나가긴 어려웠다. 국내에 유전자 편집 기술의 석학으로 꼽히는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가 있었던 것도 한국에서 공부를 이어간 이유다. 실제로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는 유전자 가위 연구자는 대부분 김 전 교수와 인연이 깊다. 원래는 김 전 교수와 유전자 가위 기술을 공부한 후에 해외 경험을 쌓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연구 성과가 좋았다. 저명한 학술지인 셀, 네이처, 사이언스의 자매지를 더해 10편이 넘는 논문을 냈다. 덕분에 해외로 나가지 않고도 국내에서 연구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배상수 교수가 개발한 초정밀 아데닌 염기교정 유전자가위. /과기정통부

-아직 젊은 나이지만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분야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편이다. 해외의 사례를 봐도 그렇다. 이 분야에서 석학 중 한명으로 꼽히는 과학자인 장펑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교수도 1981년생이고, 염기교정 기술을 개발한 데이비드 리우 미국 브로드연구소 교수도 아직 50세도 안됐다. 중국, 일본도 대부분 젊은 연구자들이 이끌고 있다. 인공지능(AI) 분야도 젊은 연구자들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으로 안다. 아무래도 새로운 학문이고,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젊은 연구자들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이 든다.”

-국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기술력은 어느 수준인가.

“한국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개발한 선도 그룹 5곳 중 하나다. 당연히 상위권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이 연구의 양과 질 모두에서 앞서 간다면, 한국은 연구의 질적인 면이 우수하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들이 많이 있다. 김진수 전 교수를 비롯해 김형범 연세대 의대 교수, 김정훈 서울대 의대 교수, 김용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대표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연구 성과에 비해서 연구자 규모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연구실도 해야 하는 연구에 비해서 인력이 부족한 편이다. 우수한 인력의 양성이 기술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요즘은 이공계 기피가 심해지고 있다. 최근 서울대에서 자퇴한 학생 10명 중 7명이 의대 진학을 위한 것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사실 이공계 기피라는 말은 2000년대 이후로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인재들이 과학이나 공학 대신 의학을 배운다는게 사회적인 문제로도 대두되던 시기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침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연구들이 많아졌다. 의·약학 분야에서는 계속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마땅한 단어일지는 모르겠지만, 바이오 르네상스라고도 부르고 싶다. 가령 피 한방울로 다양한 질병을 진단할 수 있게 되거나, 리보핵산(RNA) 백신도 개발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와 함께 앞으로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기술들이다. 결과적으로 의대를 졸업하고 연구를 하는 의사과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머지않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치료제들이 등장할텐데, 의료 현장에서 새로운 기술이 제대로 쓰이려면 의사과학자들이 연구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

배상수 교수 실험실 학생들의 단체 사진. /과기정통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치료제가 언제쯤 상용화될 것이라고 보나.

“유전자 편집 기술은 매우 빠르게 발전한 만큼 상용화도 빠른 편이다. 2012년에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개발됐는데, 노벨상을 2020년에 받았다. 이례적으로 빠른 수상이다. 그 정도로 과학계가 필요했던 기술이라는걸 인정한 것이다. 유전자 편집 기술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질병의 치료다. 특히 유전자 이상으로 이어지는 유전병 치료제로 주목받고 있다. 또 유전병은 DNA 염기 1개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도 많아 현재 단계의 기술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겸상적혈구 빈혈증에 대한 임상시험이 이뤄지고 있는데, 이미 연구자 임상으로 효과와 안전성을 확인했다. 워낙 효과가 좋아 빠르면 올해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 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다.

“독버섯을 먹었는데, 왜 위험한지 모를 때가 문제다. 그런데 독버섯에 어떤 성분이 문제인 것을 알면 제거해서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유전자 편집 분야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 하나하나 찾아가는 단계다. 국내에서도 아직 안전성 우려로 규제가 있는 편인데, FDA에서 승인이 이뤄진다면 국내에서도 점차 규제가 풀리고 개발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유전자 가위 기술은 어떻게 발전할 것으로 보나.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발전은 크게 기능과 안전성, 두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금 유전자 편집 기술이 널리 활용되고 있지만, 유전자의 DNA 염기서열 하나를 정확하게 바꾸는 것에 머무르고 있다. 가령 염기 5개를 동시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지난 2019년 새로 개발된 기술이 ‘프라임 에디팅’이다. 프라임에디팅은 DNA 염기서열을 10~20쌍 넣고 뺄 수 있어 크게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수준으로는 유전자 치료제로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적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수천개가 넘는 염기를 한번에 넣거나 뺄 수 있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2012년 처음 개발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DNA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지 유전자의 DNA 일부를 잘라내고 다시 붙여 유전자를 망가뜨리는 것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염기 교정이라고 부르는 기술이 개발됐다. DNA의 염기 하나 이상을 원하는 염기로 교체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로는 염기 일부가 잘못돼 나타나는 질병은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유전자의 DNA 여러 곳이 동시에 잘못된 질병을 치료하려면 유전자를 통째로 교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가능해지면 유전자 치료의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다. 마치 자동차 엔진이 고장 났는데, 부품 하나하나를 진단하고 교체할 필요 없이 엔진을 통으로 교체하는 방식이다. 편의성과 효능 면에서 기존 기술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농업기술기업 사나텍시드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로 일반 토마토보다 4~5배 많은 GABA를 생산하는 토마토를 만들었다. /사나텍시드

-연구자들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설계할 수 있는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할 때인 2012년 만들어서 현재까지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유전자 가위를 디자인하고 유전자 편집을 분석할 수 있는 모든 도구를 모았고,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매일 130여개국의 과학자 300~350명이 활용하고 있다. 누적 사용량은 300만회를 넘겼다. 처음 홈페이지를 만든 이유는 유전자 가위 기술이 주목받지 않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자신의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유전자 가위 분야는 경쟁이 치열하다. 경쟁 그룹이 쓸 수도 있는 도구를 공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자와 기업인의 가장 다른 점이다. 과학의 본질은 공유다. 논문도 내가 실험한 모든 과정과 결과를 정리해서 공개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유전자 가위에 더 관심을 갖고, 저변을 넓힐 수 있다면 그게 우리에게는 득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소소한 행복도 있다. 홈페이지의 기능 중 가장 많이 쓰이는 ‘표적 이탈 효과 분석’은 기반 논문의 피인용 수가 1400회가 넘었다. 웬만한 연구 논문으로는 절대 달성할 수 없는 수치다.

-과학자로서 보람을 많이 느끼는가.

“그렇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래희망이 과학자였다. 당시에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하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아톰의 ‘김박사’나 포켓몬스터의 ‘오박사’처럼 만화에 나오는 과학자를 보고 꿈을 키웠을 거다. 그래서인지 ‘어떤 과학자가 되겠다’라는 목표는 없었고 막연히 꿈을 꿨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꿈이 구체화됐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막상 직접 해보니 나랑 맞지 않았다. 대학교를 다닐 때 반도체 관련 연구실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흥미를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게 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찾은 것 같다. 과학자는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처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자신이 달에 발자국을 처음 찍은 사람이나 아무도 정복하지 못한 산 정상에 깃발을 처음 꽂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다.”

배상수 교수는 "과학자란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 걷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새로운 기술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 /장련성 기자

배상수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는

2005년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2008년 서울대 물리학 석사

2012년 서울대 물리학 박사

2012~2015년 서울대 화학과 박사 후 연구원

2015~2022년 한양대 화학과 조교수

2018년 국가연구개발 우수성과 100선 선정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

2022년 12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2022~현재 서울대 의대 부교수

한국차세대과학기술 한림원 이학부 회원